고아의 원초적 트라우마
트라우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말하며 사람이 전쟁이나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 심각한 사건(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후 발생하는 심리적인 반응을 말한다. 이 글의 제목인 ‘원초적 트라우마’란 살아가면서 어떤 큰 사건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면서, 특히 학령기 전에 형성되는 트라우마로 정의하고자 한다.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바탕으로 고아들이 지닌 원초적인 트라우마, 즉 가지지 않아도 되는데도 갖게 되는 장애를 논하고자 한다. 보육원에서 겪은 신체적 혹인 정신적인 충격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과연 고아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어떤 요소가 고아들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오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원초적 트라우마를 알고 적극적으로 치유하고자 한다면 고아들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모든 고아가 원초적 트라우마를 지녔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보육원생은 매우 다양한 가정형태를 갖고 있고, 원가정과의 관계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외상은 전쟁, 재난, 재해뿐 아니라, 자동차 사고, 강간, 성폭행, 중요한 사람의 죽음, 이별, 창피를 당한 경험, 심한 좌절의 경험, 심각한 질병이나 신체적 장애의 발생, 심한 불안의 경험, 가족의 학대 등과 같은 상황에서 흔히 발생한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외상을 남기는 것은 단연 가족의 학대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불안 경험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둘에 초점에 맞추어 고아들이 겪게 되는 스트레스를 논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정신적 외상은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다는 특성이 있다. 이를 고아가 된 아동에게 적용해 본다면, 아동은 잘못이 아닌 부모들의 무분별한 판단으로 인해 부모와 분리되는 경험을 꼼짝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강한 공포감과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데 피할 수 없고 대처할 수도 없는 상황의 경험”이 바로 정신적 외상의 본질이라고 한다. 따라서 고아처럼 힘이 없어 피할 수도 없고, 대처할 힘도 전혀 없는 연약한 자들이 정신적인 외상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모와의 심리적 단절감은 고아의 가장 큰 특성으로 비인간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 강렬한 두려움을 주고 무력감을 갖게 하는 사실상 살인에 가까운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신적인 두려움은 한 인간의 전 생애에 충격을 주고 온갖 상처를 갖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정신적 외상의 정의가 확대되면서 정신적 외상이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고아들이 원초적으로 겪게 되는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는 저조하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버려졌을 때 느끼는 정신적인 충격과 성인이 되어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 배우자의 사고 등으로 인한 충격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린 아이는 아직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아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저조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현실을 모른 채 외면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고자 아래에서는 고아들의 원초적 트라우마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엄청난 충격은 앞서 얘기한 전쟁, 재난, 불의의 사고, 강간 등보다도 훨씬 더 크게 고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충격은 불안, 공포, 회피, 일상에서의 부적응을 가져오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거부감, 상실감, 분노 3가지를 대표적으로 언급하고 싶다. 여기에는 직접 부모에게서 버려졌을 때 갖게 되는 외상이지만, 학령기 때 자신감 혹은 자존감을 잃게 하는 일상에서의 경험으로 인한 고통도 포함된다. 학교에서 제시한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아 교사에게 야단을 맞고 친구들의 눈치를 본 경험,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축하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놀림당한 경험, 보육원에 산다는 이유로 차별당한 경험 등도 아동들에게 엄청나게 고통을 주고 트라우마를 갖게 한다.
첫째 거부감은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은 울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 의사가 본능적이든 이성적이든 간에 말이다. 어릴 때는 본능에 가까운 모습으로 자신의 의사를 주로 표현하지만, 그 표현들이 거부당했을 때 느껴지는 존재감은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온다. 배가 고파 울어도 제때 분유를 먹지 못하고 기저귀를 갈고 싶어 울어도 제때 갈지 못하며 무엇보다 누군가와 눈빛을 교류하는 사랑의 관계를 거부당한 아이들은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고 경계하며 과도하게 놀라고 초조해하며, 나아가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느끼게 된다. 거부감으로 인해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서 주의 사람들에게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실제로 나는 보육원 아이 중에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별것 아닌 일로 화를 내거나 심지어 어른들이 사용하는 심한 욕설을 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이 거부는 누군가와 소통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은 표현이지만, 주변인들에게는 두려움 이상의 공포심을 느끼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외침은 거부당했을 때 내는 외침이다. 갓난아이가 우는 것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외침이다. 생존을 위한 외침은 그 어떤 요구보다도 고귀한 것이다. 따라서 유아기 때 거부를 당하는 경험은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 성인들도 누군가에게서 거부당했다고 느끼면 괴롭고 절망적일 터인데 하물며 아동들이야 어떻겠는가?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상실감이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면 아동들은 감각이 둔감해질 수 있다. 반복된 사건이 주는 고통을 피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인해 보육원에서의 힘든 생활에 저항하기보다는 의식의 상태를 변형시켜 방어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 마비 상태가 되어 모든 기억을 회피하고자 한다. 상실감으로 인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모면하고자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조절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술을 마시거나 비행학생들과 어울리고, 심하면 친구관계를 단절하기도 하고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상실감으로 인한 이러한 증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몇 년간 지속되는 것은 아이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도전하고 노력해야 하는 청소년기에 상실감으로 인해 패배의식을 지니게 된다. ‘나는 누군가에게서 버려져 실패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은 버리고 싶지만 떨칠 수 없는 일상생활 속에서 매 순간 떠올라 더욱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며 그 경험을 반복케 한다. 다시 말하지만 상실감으로 인한 충격은 성인보다 아이들이 훨씬 크다. 상실감으로 인해 자포자기를 쉽게 하게 되어 인생의 낙오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성인은 잠시는 부모를 잃은 충격에 가슴 아파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상처는 아물어 갈 것이다. 그러나 유아기 때 느낀 상실감은 아동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인생을 해석하는 방식을 왜곡시킬 것이며 이러한 왜곡은 성장할수록 증폭될 수 있다. 고통의 정도가 한없이 크지만 그런 만큼 현실감각을 둔하게 하고 인생의 목표의식이 없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유아기 때 보육원 아이들을 보호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필요한 이유다. 지금처럼 한 명의 보육사가 여러 명의 아동을 보호하는 방식은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원초적 트라우마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분노다. 보육원 생활은 엄청난 불안정한 상황의 연속이다. 보육사와의 관계, 사회의 편견과 맞서는 상황, 친부모와의 회복되지 않는 상황, 단체생활에서의 괴로운 상황, 자립을 해야 할 시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학교 친구들의 모습과의 비교, 보육원 사무실 직원들과의 갈등, 충분치 못한 용돈에 대한 고민,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에 대한 증오 등으로 인해 보육원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극단적인 흥분상태에 놓이게 된다. 부모에 대한 분노는 자연스럽게 주변 친구들에게 이어지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분노로 채워진 마음은 다른 어떤 긍정적인 표현으로도 바꿀 수 없다. 분노로 가득 찬 마음에 다른 감정이 스며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미성숙한 인격체인 까닭에 분노로 인해 모든 상황을 불안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이유로 국가의 지원과 후원자들의 관심도 의미 없이 받아들이며 보육원에서 진행되는 인지발달교육, 사회성 프로그램, 자립지원 프로그램은 큰 효과를 낳지 못한다. 분노는 보육원에 대한 원망이 되어 함께 사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마음의 안정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떤 학습도 이루어지지 않고 진로를 결정하기도 어렵다. 정서적 불안으로 인해 부적응적인 행동을 하며, 그 누구도 포용하거나 이해하지 않아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는다.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하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분노는 심리적인 외상이지만 매우 파괴적이어서 한 인간을 괴물로 만들 수도 있다. 누구에게 피해를 줘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게 한다. 화를 내는 습관은 아동을 비이성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판단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거나 작은 실수도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성인은 한숨을 내시는 등 화를 다스리는 능력이 있지만, 아이들은 분노 자체에 둔감해져 분노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세계에 갇히게 됨으로써 부정적인 심리상태가 더욱더 악화될 것이다.
어떤 관심과 지원도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먼저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갖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생부모를 대신해 부모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보호자와의 정서적인 교감이 만들어지도록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고, 아아이들이 스스로 안정감을 찾아가도록 대화를 통해 아이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 정신적 외상으로 인해 위축되고 왜곡되었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고 원만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정서적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부적응적인 행동까지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다양한 애착 관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도록 해 주어야 한다. 애착 대상이 보육사든, 먼 친척이든, 후원자든 간에 인생의 든든한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삶을 영위하게 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