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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보육원에 살 때 아프기라도 하면 아픈 아이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병원에 갔다. 그마저도 정신을 놓고 놀다가 봉고차를 놓치기라도 하면 병원 진료를 받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 주변 사람들이 ‘저 아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예방주사를 맞아야 할 때면 수십 명이 우르르 병원으로 가서 주사를 맞기도 했다. 보육원 아이들을 몇 번 만나 얼굴이 익은 간호사들은 보육원아이들이 왔다며 더욱 반겨주었다.      


중학생이 되어 가끔 병원에 갈 일이 생겨도 병원비는 내지 않았다. 1종 의료보험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병원비를 한 번도 내본 적이 없었기에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의료보험이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국민들의 세금과 직장인의 경우라면 직장 보험을 통해 의료 혜택을 누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공무원 신분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보육원 후배들은 조금 달랐다.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매우 많다. 게다가 주거지도 불분명하고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결국에는 기초생활 수급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 1종 보험자가 결국 수급자가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인건지,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 절망스러운 생각도 든다. 어디까지 국가가 도와야 하는지, 후원아동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데 국가의 도움이 오히려 방해가 되어 자립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된다.      


급식의 추억도 있다. 어릴 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는 급식소가 있었다. 보육원에서도 물론 밥은 먹었지만 나는 늘 허기가 졌다. 용돈도 넉넉지 않았기에 간식을 사먹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 점심시간을 늘 애타게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소에서 밥과 반찬을 받아 배식을 받아먹었는데 나는 매번 두세 번을 받아 먹었다. 주변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는 것만큼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자 상황은 달라졌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는 급식소가 없었다. 중학교 때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내 도시락은 친구들의 것과 너무나 비교되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항상 숨어서 밥을 먹거나 일부러 배가 아픈 척 밥을 안 먹기도 했다. 새삼스럽게 초등학교 시절이 그리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980~90년대에는 초등학교에 급식을 운영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 급식소가 있는 초등학교는 내가 자랐던 지역에서 단 한 곳뿐이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초등학교 때라도 급식소가 있는 초등학교를 다닌 일은 너무도 다행이었다.      


한 달에 한번 이발 봉사를 해주시는 분들이 보육원에 오셨다. 짧은 시간에 많은 아이들의 머리 손질을 해야 하기에 모두 같은 스타일로 머리를 잘랐다. 보육원 퇴소 후 처음 미용실에 가서 커트를 하는데 커트 비용이 그렇게 비싼 줄 처음 알게 되었다. 내 돈을 내고 머리를 자르려니 괜히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고 새삼 예전 이발 봉사를 와주신 분들의 노고가 생각나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진로를 결정할 때 도움을 주신 학습 지도 후원자님의 도움도 평생 잊을 수 없다. 매주 정기적으로 날짜를 정해 공부를 가르쳐주러 방문하셨는데, 회사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몇 년을 쉬지 않고 오신 분이다. 그분과 함께 몇 년을 공부하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시간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이유로,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을 강제로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교사가 된 이후에 학습 봉사를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이제야 그 분들의 수고가 얼마나 헌신적이고 대단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값진 깨달음은 지금까지 내가 바르게 성장한 이유가 나의 노력과 더불어 수많은 후원자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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