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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관대한 우리 사회

오죽하면 버렸을까의 거짓

참으로 관대한 우리 사회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정이 많다. 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나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은 자기와 비슷한 세대, 또래에게 더욱 강한 것 같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자기와 동떨어진 세대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른은 당연히 아이들보다는 현명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깔려 있기도 하고, 도덕성을 판단할 때에도 같은 성인에게 더 관대하다. 성인이니까, 아이들보다는 인생을 더 오래 살면서 인생의 경험을 알 테니 아이를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해하려고 한다. 아이의 입장이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죽하면 그랬을까’ 라는 말로 덮으려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버렸을까’라는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한적한 공원 화장실에서 몰래 아기를 낳아 변기에 버리는 사건들을 뉴스에서 보면 가슴 아파하기 보다는 ‘오죽하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라며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러한 행동은 결코 살인방조죄와 다른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아이를 잘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토록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세태를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부부가 둘 다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기도 한다. 집에서 부모 없이 방임된 아이들은 스스로 라면을 끊여 먹으려다가 화재가 나서 죽음을 맞이한 처참한 사건도 있었다. 이혼을 한 남자는 재혼을 했지만 새엄마가 친자식만 보살피고 남자의 아이와 차별한 끝에 결국은 작은 여행 가방에 아이를 넣어 학대를 하여 죽인 사건을 보면서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 이러한 아픔이 나만이 느끼는 감정인가. 그렇다면 너무나 슬프고 비참한 일이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족의 문제나 부부 문제를 상담하는 코너를 가끔 보게 되면, 상담하는 이들은 아이들을 너무도 쉽게 ‘보육원에 맡겨라, 국가에서 잘 보살펴준다’고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보육원에서 자란 나는 그 댓글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댓글을 단 사람에게 당장 찾아가 당신도 한번 살아보라고 따지고도 싶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게 설령 어른이 아니라고 해도, 너무도 쉽게 재단하고 결정내려 버린다.     

 

우리 사회가 너무 관대하다. 오죽하면 버렸을까, 가 아니라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야 했을까, 부모로서 역할을 다하지 않았는지 질책하기도 하며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사연들은 많고, 불행은 너무도 흔하다. 모두 이해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를 버리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받을 수 없다. 가장 그릇되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부모의 자존심은 아이를 지킬 때 비로소 빛이 난다는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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