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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키웠네라는 말의 불편함

잘 키웠네라는 말의 불편함    

 

학교에서 동료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이었다. 한 선생님이 자녀분이 경찰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른 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아들 참 잘 키웠네’라고 얘기했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왜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아들이 경찰의 꿈을 꾸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찰이 된 것이 아닌가. 물론 부모가 자식의 뒷바라지도 하고 물심양면으로 애를 썼겠지만 자식의 성취가 부모가 잘 키운 덕이라고 생각하는, 자식이 부모의 부속물이라 여기는 인식이 여전히 팽배하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님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들은 자식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저 사람은 부모복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자식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부모복이라...... 그렇게 따지면 나는 부모복은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어엿하게 성장해 그간의 노고에 보답을 할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어떨까? 나의 경우는 사람들이 내가 교사 된 것을 보고 잘 자랐네, 또 스스로 열심히 해서 "잘 자랐네"라고 초점을 나에게 맞춘다. "저 보육원 사람 잘 키웠네" 아니면 제 친부모에게 같이 살진 않았지만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부모가 잘 돌봐 줬네" 사실은 친부모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러한 상황들이 직장에서 많이 펼쳐진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들 중에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 많은 분들은 얘기를 한다. 흔히 인간관계,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즐겨 하는 얘깃거리이다.  

    

명절에 어느 부모님이 선산에 가서 벌초를 하고 명절에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어딜 가고 대부분 얘기들이 관계 중심의 그런 이야기들이다. 우리나라는 관계중심인데 아들이 결혼을, 아들이 경찰관이 되었지만 우리는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아들 잘 키웠네 라고 얘기를 한다. 그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찰관이 된 것에 대해서는 노력한 거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부모님의 (헌신적인) 역할에 대해서만 더 의미 있고 더 중요하고 그 역할에 공이 있다 라고 우리는 흔히들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 관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저희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그 얘기가 한 분의 아들이 경찰이 되었는데  "부모가 잘 키웠네" 라고 하는 현실을 보면서 언제까지 다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내가 감내하고 이겨 내고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께서 며칠 전에 부모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자주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어른이 안 계시기 때문에 물론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신 후원자님들께 그리고 엄마로 모시는 분들 많이 있지만 친부모가 없기 때문에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고 또한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것을 봤을 때 개인적으로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생각하지 말아야 될 짐 부모가 없어서 다행이다 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부도덕한 마음에서 비롯되지만 나의 이런 존재 나의 정체성을 내가 스스로 알아가고 발견하고 그런 모습 속에서 아내와 저희 장모님 장인어른에게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로서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나로서 나는 내 인생을 펼쳐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씩 우리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친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가곤 했다. 물론 당연히 가야 하지만 나는 친부모가 없기 때문에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그런 신경을 써 주는 그런 관계 속에서 나는 왠지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당연히 많은 분들을 위로하여 드려야 하고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도움을 받지 못할 친부모가 없는 그런 상황에서 나는 조금 다르구나 라는 그런 생각을 해 보면서 가끔씩은 나를 보살펴준 보육원의 원장님께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얼마나 많은 분들에게 연락해야 할까? 내가 위로를 받아야 하니까 평생 어머님으로 모시고 그렇게 살아가는 제가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학교에서 친부모는 아니지만 저를 키워 준 원장님께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떤 휴가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글을 쓰면서 내 마음속에 혹시 열등의식이 있는 것은 아닌지 당혹스럽다.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비교의식 그리고 우리 주변에 우리 친구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제가 찾아뵐 때 제가 생각하는 것들 그런 모습들이 나의 환경과는 다르구나를 빨리 인지하면 빨리 인지할 수록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나에게 고민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보육원 출신 고아가 아니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경험하지도 못할 그리고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을 함께 나누는 것은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내가 겪는 수많은 갈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이땅의 모든 보호종료아동들이 겪는 문제들을 함께 나누며 마음의 짐을 덜고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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