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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pr 05. 2023

[D-271] 고래와 함께 헤엄을

95번째 글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일이라기보다는, 나를 집어넣어서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었다. 바로 고래와 함께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었다. 나탈리 카르푸셴코의 그 유명한 고래 사진처럼. 빛이 약간만 들어와서 어두컴컴하고 어슴푸레하고 검푸른 바닷물 속에 내가 떠 있다. 나는 잠수복이나 산소마스크 같은 것은 걸치고 있지 않다. 그냥 수영복이나 일반적인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내 곁에는 고래가 한 마리 있다. 고래는 때로 물을 뿜어내고,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내며 나를 이끈다. 나는 고래와 교감하며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고래와 나는 서로에게 장난을 치면서 물살을 가른다. 우리는 때로 나선형 궤적을 그리면서 서로를 빙빙 돌며 나아간다. 바닷속이지만 어쩐지 숨이 별로 차지 않는다. 처음부터 물속에서 숨을 쉴 줄 알았던 것처럼 나는 자유롭게 숨을 쉬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러다 숨이 부족해지면 고래와 나는 함께 해수면 위로 솟구쳐서,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웅장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바닷속으로 떨어진다.


고래와 헤엄치는 상상 외에도 나는 이런 비슷한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그려 왔다. 코끼리를 타고 밀림을 함께 걷는 이미지, 집채만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서 털을 움켜쥐고 바람을 가르며 함께 달리는 이미지, 몸통 높이가 내 키만큼 커다란 늑대와 함께 달밤에 산책을 하는 이미지, 지프 자동차만한 사이즈의 거대한 사슴의 등에 올라앉아 풀밭을 유유히 거니는 이미지, 날개 한쪽이 몇 미터나 되는 독수리와 함께 상공으로 날아오르는 이미지, 울산바위만한 커다란 바위가 살아나서 나를 집어 들고 꼭대기에 얹어 주는 이미지, 오래된 숲에서 오래된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미지 등.


이 모든 상상의 공통점은, 모두 '거대한' 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거대한 존재와, 그냥 보통 사이즈의 나.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감. 나는 이런 것들을 꿈꿔 왔다.


거대한 것은 나를 압도한다. 거대한 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거대한 것은 나를 갑자기 판타지 세계로 밀어 넣는다. 거대한 것은 경탄을 자아낸다. 거대한 것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거대한 것은 감동을 준다. 거대한 것과 관련된 이 상상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비현실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탈현실을 통해 마침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내 무의식적인 욕망을 투영한다.


어젯밤에도 고래와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



/

2023년 4월 5일,

출근길 버스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Todd Cravens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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