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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pr 12. 2023

[D-264] 머릿속을 고요하게 만드는 연습

102번째 글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아주 선명한 상상을 하는 사람이다. 빠르게 이미지를 그려내고, 더 빠르게 이야기를 상상해 낸다. 그래서 나는 한시도 머릿속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늘 무슨 생각인가를 끊임없이 하느라 머릿속이 언제나 시끌시끌하다. 재미있는 점은 내가 차분하고 조용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라는 거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는 하다. 나는 감정이나 속마음을 좀처럼 밖으로 잘 꺼내 놓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속으로 모든 것을 한다. 고요해 보이는 겉모습 아래로 격렬하게 요동치고 휘몰아치는 머릿속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쉬지 않고 생각을 한다. 생각을 멈추는 방법은 무언가 다른 것에 열중하는 것뿐이다. 특히 아주 단순한 것.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할 수 있는 단순한 작업이 가장 적합하다. 앉아서 비즈를 꿰거나, 밤 껍데기를 깎거나, 새우 껍질을 까는 일처럼 말이다. 이런 작업을 할 때에도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생각만, 눈앞에 놓인 이 작업에 대한 생각만 할 수는 있다. 이것도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런 단순 작업을 하면서 머리를 좀 비우는 듯 싶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이 어느새 저 멀리 우주까지 가 있다. 이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안 하고 싶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나는 이런 성향을 타고난 거다. 어쩔 수 없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 딱히 불만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때때로 피곤할 때가 있다. 가만히 앉아서 쉬고 싶은데, 몸을 아무리 편안히 뉘어도 머릿속이 쉬질 못하기 때문이다. 피로를 덜고 싶어도 머릿속에서 화산이 터지고 태풍이 몰아치고 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런 성향이 최근의 바쁘디 바쁜 상황과 맞물려서 나는 요새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듣다가도 일 생각을 하고, 샤워를 할 때도 일 생각을 하고, 자려고 누워도 자기 전까지 일 생각을 한다. 매 순간 머릿속으로 아이데이션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이 머릿속이 휴식을 허락해 주질 않는다. 그래서 몸은 퇴근해도 정신적으로는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다.


오늘 아침에 출근할 때도 버스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했다. 생각을 안 하는 것은 포기했고, 일부러 일 말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무의식이 자꾸 나를 아이데이션 회의로 이끌었다. 그러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장에 적어 두기도 했고.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니 갓 출근했는데도 이미 2~3시간은 일한 것 같은 피로가 찾아왔다. 더 이상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는 곧 번아웃이 심하게 올 것만 같아서다.


그래서 오늘 퇴근할 때는 일부러 일 생각으로부터 나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잡생각을 없애고 다른 것에 몰두하기 위해서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들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런 자극을 주기엔 내가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피곤한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잠이 안 올 것은 알았지만 그대로 눈을 감고 있기로 했다. 그렇게 가만히 기대고 앉아 있자 자연스레 일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다른 생각을 하려다 실패한 나는 결국 머리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의 홍수 속에 잠겨 있는 내게 어떤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쇠붙이가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 나는 계속 눈을 감은 채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나는 그 소리가 내 가방에 달린 지퍼 고리 두 개가 부딪혀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짤랑, 짤랑, 짤랑, 그 소리에 집중하자 머릿속에서 일 생각이 조금씩 물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계속 눈을 감은 채로 내 가방을 떠올렸다. 짙은 회색의 네모난 백팩, 오래 써서 약간 닳은 네 귀퉁이, 방수 재질의 천이 주는 매끄러운 질감, 두껍고 푹신한 어깨 끈, 그리고 두 개의 지퍼 고리. 나는 그 고리가 부딪히는 모양을 상상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그 고리들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래서 어떻게 부딪혀서 짤랑이는 소리를 내는지. 이 상상을 하자 머릿속이 좀 조용해졌다. 꽉 들어차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방 하나만을 남기고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나는 머릿속 폭풍을 잠재우는 방법 하나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비교적 고요한 30분을 보내고 나자 한결 피로가 가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나는 가방을 상상하는 동안 해방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했다. 앞으로 이 방법을 조금 더 연습해보려고 한다.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연습이 지금 내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롱런하기 위해서, 나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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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2일,

소파에 앉아서 부드럽고 따스한 분위기의 음악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Jonny Clow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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