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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pr 13. 2023

[D-263] 시점을 바꾸는 것의 마법

103번째 글

전기 소설이나 전기 영화는 지루해지기 쉽다. 한 인물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삶에서 가장 격렬하고 극적인 부분만 따 와서 이야기로 만들면 재미있을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삶 전체를 다루는 전기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인생이란 것이 언제나 극적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빠르고 다이나믹하게 돌아가는 시기가 있는 반면,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기가 있다. 그래서 이 두 시기를 모두 다루어야 하는 전기 형식의 작품은 자칫 잘못하면 지루하고 따분해지게 된다.


하지만 시점을 바꾸면 얘기가 달라진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도 어떤 화자의 시선으로 인물의 삶을 바라보냐만 달라져도 이야기가 갑자기 흥미진진해질 수 있다. 팀 라이스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에비타>가 아주 좋은 예시이다. <에비타>는 15살 소녀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에바 페론이라는 인물의 삶 전반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팀 라이스는 이 문제를 '체'라는 익명의 해설자 캐릭터를 내세우는 것으로 영리하게 해결한다. '체'는 체 게바라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혁명가 컨셉의 반동인물이자 극의 내레이터이다. 이 '체'의 시선으로 에바의 삶을 바라보는 형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신선해지고 재밌어진다. 관객에게 직접 에바의 삶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체'라는 인물의 시선을 덮어씌워서 보여주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렇게 시점을 옮겼기 때문에 <에비타>는 그저 그런 전기 뮤지컬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히트작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뮤지컬 <엘리자벳>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의 삶 전반을 다루며 전기 형식을 제법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암살자인 루이지 루케니를 등장시켜, 그의 시선으로 극이 전개되도록 한다. 그렇게 시점을 루케니의 시선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 그리고 관념적인 죽음을 의인화해서 등장시켰다는 점이 <엘리자벳>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참고로, 이 루케니라는 캐릭터는 <에비타>의 체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 캐릭터에 영향을 많이 받아 만들어졌다.) 이렇게 시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평범한 전기가 참신하고 흥미로운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 시점의 마법, 형식의 마법을 내 인생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재미없다고 느껴진다면, 너무나도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만 반복된다고 느껴진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내 삶을 한번 들여다보는 것이다. 딱히 나를 아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냥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이어도 좋다. 단지 내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시점만 갈아 끼우면 된다. 그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그 사람이 바라보는 내 삶은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 투성이다. 내게 익숙하고 지겨운 일상이 그 사람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다. 그래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전혀 없다.


실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내겐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 상대방에게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일 때가 있다. 또 반대로 그 사람은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신기함 그 자체인 경우도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누구에게도 똑같이 흘러가지 않는다. 내 시선으로 보는 내 삶은 매일이 다를 바 없이 너무나도 평범하고 별다른 자극 없이 흘러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내 삶에 너무 익숙해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거쳐 내 삶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때때로 무료하고 피곤할 때면 이 시점의 마법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 싶다. 시점을 바꾸기만 했을 뿐인데 내 삶이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느껴질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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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3일,

식탁에 앉아서 잔잔한 연주곡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Paul Skorupskas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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