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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pr 11. 2023

[D-265] 우리가 숫자에 부여한 의미

101번째 글

숫자는 언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숫자는 상징이다. 인간은 숫자를 필요에 의해 만들어냈고,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숫자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게르만인은 9를 중요한 숫자라고 생각했고,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며, 한자 문화권에서는 4를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자연스레 숫자에 의미를 담아 놓고 상징과 은유로서 숫자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거창하게 글을 시작한 이유는 어제의 글을 쓰는 내 마인드와 오늘의 글을 쓰는 내 마인드가 다른 것이 신기해서다. 어제 나는 올해의 100번째 에세이를 썼다. (글 보러가기) 이 100번째의 에세이를 쓰기까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당일뿐 아니라 거의 열흘 전부터 고민했다. 100번째 글에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지를 말이다. 글을 쓰기 직전까지도 아주 각 잡고 앉아서 특별한 글을 쓸 생각을 했었다.


반면에 오늘 이 101번째의 에세이는 그런 고민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엊그제의 99번째 에세이도 마찬가지다. 나는 100번째를 얼마나 특별하게 써내야 할지만을 생각했지, 99번째나 101번째에 대해서는 딱히 고민해 보지 않았다. 이 마인드의 차이가 신기하게 다가왔다. 새삼스럽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99일과 100일과 101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숫자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100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100은 특별한 숫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십진법의 기본이 되는 수인 10을 10번 더한 수. 10의 10배가 되는 수. 세 자리로 진입하는 첫 번째 수. 백분율의 기반이 되는 수. 100은 특별하고, 그래서 우리는 100을 중요한 상징으로 여긴다. 어떤 사건이 있은 지 100일째 되는 날에 크게 축하를 하고, 10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한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 쓰는 이 글쓰기 챌린지에서는 굳이 100을 더 중요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어제는 엊그제와 비슷한 날이었고 오늘과도 비슷한 날이었다. 덜 중요하지도 더 중요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중요도를 갖고 있는 날, 그 날의 에세이를 완성하느냐 마느냐라는 똑같은 숙제를 갖고 있는 날. 어제 100번째의 에세이를 쓰려고 빈 글쓰기 창을 앞에 두고 이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100번째에 큰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오히려 100번째의 에세이를 멋지고 의미 있게 각 잡고 써 내려는 노력이 나 자신에게 불필요하게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하던 것을 접어 두었다. 그리고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평소보다 더 짧고 꾸밈 없는 글이 완성되었다. 특별한 가치를 담지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않는 글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어제의 글이 마음에 든다. 어제나 오늘의 에세이처럼 평범한 글이라는 점이 특히 좋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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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1일,

소파에 앉아서 창 밖 바람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Mick Haupt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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