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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pr 23. 2023

[D-253]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113번째 글

주말 동안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차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가족들과 함께 떠난 1박 2일의 짧은 스케줄이었다. 이번 여행은 그냥 휴식을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딱히 뭔가 특별한 것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숙소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방에서 편안하게 쉬고, 가까운 곳을 산책하고, 주변 자연 경치를 즐기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너무 좋았다. 그냥 호텔 소파에 늘어져라 기대서 TV를 보고 있어도 좋았다.


여행을 가서 뭔가를 한다는 것보다도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리프레시가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호텔 방 안에 있기만 해도 말이다. 굳이 낯선 곳이 아니어도 괜찮다. 내가 잘 아는 곳, 내 생활 반경 속에 있는 익숙한 장소여도 똑같이 리프레시가 되는 기분이다. 예전에 집 바로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잠시 지냈던 적이 있다. 가족들이 나만 빼고 한꺼번에 코로나에 걸려서 격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넘도록 거의 내내 호텔방에서만 머물렀었는데, 걱정이나 답답함도 물론 있었지만 묘한 해방감도 느꼈었다. 그때 왜 사람들이 호캉스를 가는지 실감했었다. 그냥 낯선 방 안, 내 공간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호텔방은 내 생활이 묻어 있지 않은 공간이다. 내 취향도 내 감정도 전혀 묻어있지 않은 백지의 공간. 그 공간에 가면 나는 여행객이 된다.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 나는 놀러 온 손님이기 때문이다. 그 기분이 좋다. 손님으로 지낼 수 있는 자유가 좋다.


생각해 보면 인생도 그렇지 않나 싶다. 인생은 다른 곳에서 삶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지금 이곳으로 온 여행이니까. 언젠가 죽음이라는 교통편을 타고 또 어딘가로 떠나갈 테고. 이 지구라는 공간은 내 생활이 전혀 묻어 있지 않은 공간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내 흔적도 존재하지 않고, 내가 등장할 것이라는 암시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이 삶에서 나는 여행객이다. 나는 놀러 온 손님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삶을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도 같다.


루미의 시 중에는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라는 구절이 있다.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 시를 떠올리고 있다.


하루 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입을 뗍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영혼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생의 끝을 맞고 싶습니다.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나는 온전히 취할 것입니다.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그런데 이 새장에 앉아……
다시 날아오를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내 귓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입을 통해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눈을 통해 밖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요?
영혼은 무엇인가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해답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취기로 이 감옥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건 그가 나를 다시 집에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이런 말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득문득 이어지는 생각들……
이 질문들 너머로, 깊은 고요와 침묵에 들어섭니다.

- 잘랄 앗 딘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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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3일,

침대에 엎드려서 랜덤 재생된 유튜브 영상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Vojtech Bruzek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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