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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y 02. 2023

[D-244] 바쁘다는 이유로 포기하게 되는 것들

122번째 글

어제는 근로자의 날이었다. 늘어지게 쉴 수 있는 휴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 새벽부터 밤까지 내내 일을 했다. 그저께는 일요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께에도 일을 했다. 그끄저께는 토요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끄저께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원래 쉬어야 하는 주말에도, 심지어는 근로자의 날에도, 나는 쉬지 못하고 계속 책상 앞을 지켜야 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간단하다. 바쁘기 때문이다. 마감일이 있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촉박한데 끝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내 휴식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다. 나도 회사를 다니며 이 정도로 바쁜 건 처음 겪어봤다. 또 이 일은 회사에서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꼭 기한 내에 끝내야 한다고 압박을 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되는 데까지만 하면 된다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팀원들이 말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다. 나는 완벽주의 기질이 있고 한번 일을 하면 제대로 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이런 상황에서 내 시간을 다 빼 가면서 일에 정신을 쏟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 주까지만 이렇게 바쁠 예정이다. 그 뒤에는 숨을 좀 돌릴 수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일 아침으로 잡아 두었던 필라테스 수업을 취소했다. 내일 퇴근하고 나서 보러 가려고 했던 판소리 공연도 취소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일들을 포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포기했다. 나의 휴식을 포기했다.


이렇게 여러 번의 포기를 거듭한 나를 잠식하는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닌 죄책감이다. 지금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옛날 사람들이 열심히 싸워서 얻어낸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내가 훼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 자신을 내가 혹사하고 있다는 죄책감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죄책감이다. 그들이 목숨 걸고 투쟁한 끝에 내게 주어진 권리를 나 스스로 내던지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의 19세기는 위대하지만, 20세기는 행복할 것입니다." 작중에서 혁명을 하는 학생들의 리더로 등장하는 앙졸라가 하는 연설의 일부다. 처음 <레미제라블>을 읽었을 때부터 인상 깊게 남은 이 구절을 떠올리면 나는 어쩐지 염치가 없다. 그리고 앙졸라에게 미안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시민인데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인류가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정작 그 미래의 인류인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지난 일주일 간 내가 스스로 포기한 나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죄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나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내게 주어진 내 권리를 더는 포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한 한심한 나는 오늘도 늦게까지 일을 한다. 나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나는 일을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아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여기에 적어 둔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이 글을 떠올리며 부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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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일,

책상에 앉아서 야근을 할 준비를 하며.



*커버: Image by Priscilla Gyamfi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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