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May 18. 2023

[D-228] 다 사정이 있겠거니

138번째 글

기분이 좋은 날에는 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혀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아, 죄송합니다, 하고 지나갈 수 있다. 상대방이 나를 노려보거나 욕을 뱉어도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속으로 욕 한번 하면 금세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모든 게 예민하게 다가온다. 누군가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면 왜 저 사람은 내게 어깨를 부딪혔나, 왜 하필 내 어깨 쪽으로 몸을 움직였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닐까,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걸까, 왜 오늘은 이런 사소한 데에서까지 운이 안 좋은가, 대체 나는 왜 이럴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냥 잊어버릴 수도 있는 작은 사건인데도 속이 상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날이 선 반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울과 함께 난데없이 분노가 차오른다. 잔뜩 예민해진 채로, 갑자기 그 사람을 증오하기 시작하는 거다. 짜증이 잔뜩 나서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게 된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에너지는 애먼 사람에게 가서 꽂힌다. 이렇게 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어버리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이런 걸 보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다.


이 악순환을 중간에 끊기 위해서 요즘은 '그러려니'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으니, 부정적인 에너지를 덜 축적하려고 노력하는 방향이다.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 그냥 '저 사람도 다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거다. 저 사람이 나와 어깨를 부딪히고는 사과도 없이 가버리긴 했지만, 그 사람에게도 다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사람은 오늘 인생 최악의 날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와 심하게 부딪혔는데도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삶과 죽음이 걸린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너무너무 급하게 가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액션 영화에서 군중들 사이로 도망치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이렇게 '그러려니' 하는 것은 무조건 참는 것과는 다르다. 비겁하게 침묵하고 무조건적인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것과는 다르다. 잘못된 일에는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불의한 일에는 나설 줄도 알아야 하고, 참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하고, 동의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우리의 권리이고 의무이니까. 이건 무작정 참아 넘기라는 뜻이 아니라, 부정적인 에너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조금 덜 받기 위해서 '싫어하기'를 적당히 하자는 거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그러려니'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연습이다. '다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상대방을 이해해 주려 노력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우울과 분노에 잠겨버리지 않도록,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상처 주고 그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

2023년 5월 18일,

소파에 앉아서 창 밖의 소음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Ben Weber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229] 게임을 안 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