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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y 21. 2023

[D-225] 가늠해 보는 능력

141번째 글

어제와 오늘, 주말 이틀 동안 내내 일을 하고 있다. 갑자기 일이 몰아닥쳐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몸은 힘들어도 웬일인지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다. 이미 한번 해본 적 있는 업무라서 지금 이 일을 다 끝내기 위해서 대강 어느 정도가 걸릴지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어젯밤, 내가 주말 동안 해야 하는 일의 절반 정도를 마무리하면서 남은 일이 얼마나 걸릴지를 한번 가늠해 보았다. 결론을 도출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은 업무량, 내 집중력, 내일 해야 하는 다른 일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았을 때, 이 정도면 내일 아침 일찍 시작하면 저녁때까지는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자 내일의 스케줄을 자연스럽게 세워 볼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잠깐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한 잔 테이크아웃하고,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아야겠다는 계획이 몇 초만에 빠르게 세워졌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묶고 커피를 담아 올 텀블러를 챙겨서 문을 나서며, 오늘 해야 하는 것들을 어떻게 분배해서 할 것인지를 떠올렸다. 어젯밤처럼 쭉 견적이 뽑혀 나왔다. 두 종류의 업무를 해야 하는데, 오전 중으로는 어제 하던 작업을 마저 하고, 12시 정도에 그 일이 끝나면 빨래를 돌려놓고 점심을 간단히 먹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책상 앞에 앉고, 오후부터는 남은 한 종류의 작업에 집중하면 된다는 스케줄이 나왔다. 그 작업은 6시간 정도면 끝낼 수 있겠다는 계산도 함께 실제로는 더 복잡한 견적이었지만 대강 설명하자면 그렇다.


이 정도면 얼마나 걸리겠구나, 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은 일을 하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을 준다. 아무리 고되고 귀찮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견적이 뽑히고 나면 그래도 해볼 만하다. 이걸 언제 다 하나, 하는 막막한 기분은 들어도 적어도 무섭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공포와 불안은 잘 모르는 데에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또 이 일을 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바빠도 그래도 좀 견딜 만하다. "6시간 정도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너무 하기 싫다."와 "얼마나 걸릴지를 모르겠다. 오늘 밤을 새우면 다 할 수 있을까?"는 많이 다르니까. 전자는 내가 마음을 좀 다잡거나 기분 전환을 하고 와서 책상에 앉으면 해낼 수 있지만 후자는 일이 끝나기 전까지 내내 불안함과 초조함에 시달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


또 이렇게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지를 가늠해 볼 수 있으면 계획을 쉽게 세울 수가 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은 덤이다. 예를 들어 한눈팔지 않고 몰두한다면 대강 6시간 정도가 들 거라는 견적이 뽑혔다고 해 보자. 그러면 어차피 오늘 하루 종일 이 일을 해야 할 것 같으니, 지금 잠깐 낮잠을 자 두어야겠다는 선택을 할 수가 있다. 그래야 집중력을 높여서 끝낼 수 있으니까. 또 2시간 동안 일한 뒤에 나가서 커피를 사 온 뒤 남은 4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며 일에 몰두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이런 가늠해 보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일단 나를 잘 알아야 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 능력은 경험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상황, 내가 잘 아는 업무라면 견적을 뽑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아마 훨씬 정확하고 훨씬 정교하고 훨씬 쉽게 견적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나이 든다는 것의 멋진 점이 아닐까 싶다.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대사처럼, 지나온 시간들은 '세월이 흘러간 것이 아니라 마일리지를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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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1일,

식탁에 앉아서 TV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pina messin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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