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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y 28. 2023

[D-218] 한심할 때와 아쉬울 때

148번째 글

어떤 영화를 보면 한심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영화가 이런 상태로 세상에 나오게 된 건지 의아하고, 대체 왜 아무도 영화가 이 꼴이 날 때까지 말리지 않았던 건지 궁금하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데에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지적하기도 힘들어서 그냥 한숨이 푹푹 나온다. 영화를 보는 데 내가 시간을 썼다는 게 너무나도 억울하고 아깝다. 영화를 보기 전으로 시간을 돌려 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또 어떤 영화를 보면 아쉽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 정도에서 그쳤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고 실망스럽다. 영화에 좋은 부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어서 그렇지 못한 부분들이 더 눈에 띈다. 그래서 자꾸 어떻게 하면 영화가 더 나아질 수 있었을지를 고민해 보게 된다. 어떻게 하면 내가 기대한 만큼의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지를 말이다.


한심한 영화와 아쉬운 영화는 둘 다 만족스럽지 않은 경험을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내가 갖고 있는 기대치다. 똑같이 퀄리티가 떨어지는 영화여도, 기대하면서 본 영화는 일반적으로 실망과 아쉬움을 안겨주지만 별다른 기대 없이 본 영화는 그냥 한심할 뿐이다. 아무런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영화가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없으면 아쉬움도 없다. 그러니까 아쉬움이나 실망은 내가 갖고 있는 기대치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 점은 똑같이 적용된다. 나 자신이 해낸 일에 아쉬운 기분이 들거나 나 자신이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없다면, 내가 나 자신에게 애정이 없다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실망이나 아쉬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쉬운 기분, 실망스러운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건강하기까지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내가 나를 사랑하고 믿고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나 자신을 한심하게 느끼는 것은 좋지 못하다. 한심한 감정은 나를 믿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다. 그리고 아쉬운 감정으로부터는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분석할 수 있고, 어떻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한심한 감정으로부터는 이런 걸 할 수 없다. 그냥 한숨을 푹푹 쉬는 것만 할 수 있을 뿐.


그래서 아쉬워하는 건 괜찮지만 한심해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나 자신에게 갖는 애정과 믿음과 미래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큰 기대를 갖고 나를 닦달하며 괴롭히는 것도 안 좋지만, 나를 포기해 버리는 것은 더 안 좋으니까.



/

2023년 5월 28일,

침대에 앉아서 영화 소리 들으.



*커버: Image by Daria Nepriakhin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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