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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n 02. 2023

[D-213]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는데

153번째 글

오늘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일을 시작했다. 분명 이러지 않기로 했었는데, 내 잠과 내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업무에 몰두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는데, 너무 많이 노력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는데. 결심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할 일이 있고 일정이 촉박하니까 자꾸만 나를 갈아 넣게 된다. '나 하나만 고생하면 되는데.' 이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과로로 밀어 넣게 된다.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잖아.' 이 생각을 버리는 것이 어렵다. 내 희생으로 일정을 맞출 수 있다면, 내 희생으로 일을 잘 끝낼 수 있다면, 그러면 나 자신을 괴롭혀도 괜찮다고 느껴진다.


아마 그만큼 내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정작 나 자신이 고통받고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거다. 사실 누구도 야근을 해서는 안되고 누구도 새벽 3시에부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당연하게도 야근을 하기로 결정했고 별다른 고민도 없이 새벽 3시에 알람을 맞췄다. 별일 아니라고,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느끼면서. 왜냐하면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니까. 나 혼자서 하루 고생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을 가지고서 또다시 나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하지만 나의 희생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희생은 모두의 희생이다. 내가 과로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 팀 전체가 과로한다는 뜻이다. 내가 속한 모든 그룹이 고통받는다는 뜻이다. 2011년에 개봉한 영화 <무협>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존재는 영겁의 업으로 얽혀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어요. (중략)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우리 모두가 그 죄를 나누어 가집니다. 우리는 모두 공모자인 셈이죠."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 깊게 들었던 대사이다. 범죄는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는 데까지는 한 사회가 기여한다. 희생도 죄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인 것처럼 한 사람의 희생은 모든 사람의 희생인 것이다.


그래서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는데'라는 명제는 사실 잘 성립하지 않는다. 그 희생이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이 소중한 줄을 모르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았을 일들을 나 자신에게는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나를 학대하는 일이 곧 온 사회를 학대하는 일인데 말이다. 내가 다른 이들의 고통에 신경을 쓴다면, 당연히 나 자신에게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을 나누어 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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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일,

소파에 앉아서 TV에서 방송하는 음악 프로그램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WEB AGENCY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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