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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n 03. 2023

[D-212] 메모가 필요해

154번째 글

메모가 필요해. 이런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긴 했지만 내가 오늘 쓰려던 글은 사실 메모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른 내용의 글을 쓸 작정이었고, 소재와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어떻게 글을 전개해야 할지도 머릿속으로 구성해놨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구성을 연극을 보기 위해 찾은 공연장 객석에 앉은 채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공연 시작 몇 분 전이라서 핸드폰은 이미 꺼둔 상태였기 때문에 떠오른 아이디어와 구성을 적어 둘 수가 없었다. 켜서 메모하고 다시 끄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펜과 종이는 들고 다니지 않게 된 지 아주 오래되었고.


그래서 나는 일단 머릿속에 저장해 두기로 했다. 연극이 끝나기까지 90분 동안은 기억에 의지해 보고, 다시 핸드폰을 켜면 그 때 메모장에 적어 두기로 말이다. 연극을 다 보고 난 뒤에도 내가 과연 이 내용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득 '90분밖에 안 지났는데 나조차도 기억을 못 하는 소재라면,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없는 내용일 것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을 하고 나자 자신감이 좀 생겼다. 연극을 본 이후에도 기억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느꼈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지고 핸드폰이 켜지고 나자, 나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내가 이 내용을 까먹을까 봐 걱정했다는 것,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것을 글로 쓸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했다는 것. 정작 바로 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이 완전히 백지였다. 아예 전부 까먹었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내용의 글을 썼을 것 같은데, 그 내용 외에 다른 상황들은 모두 기억이 나서 괴로웠다. 어떻게든 떠올려 보려고 끙끙댔지만 결국 기억해 내지 못했다. 


메모를 해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예전에는 꽤나 기억력이 좋았던 것 같은데 이젠 메모를 제때 해두지 않으면 자꾸만 잊어버리게 된다. 아마 터치 몇 번이면 켜지는 핸드폰 메모장 앱과 언제나 함께한지 오래되어서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 게 아닐까 싶다. 메모가 너무 쉽고 너무 생활화되어 있어서 무언가를 기억할 필요가 없어지다 보니 그 부분이 녹슬어 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지금 약간 헷갈리고 있다. 과연 내게 메모가 필요한지 아닌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메모해 두는 습관을 더 길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 기능을 더는 퇴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메모하지 않고 기억해 두는 연습을 좀 더 해야 하는 것인지. 메모라는 양날의 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

2023년 6월 3일,

소파에 누워서 음악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Kelly Sikkem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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