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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n 01. 2023

[D-214] 밍기적거리며 하루 보내기

152번째 글

어제 나는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 오랜만에 갖는 휴가였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어제는 '최고의 하루' 조건을 충족시켰다. 다른 사람들이 일할 때 잠시간 업무에서 해방되어서 푹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한 날이어서 좋았고,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드물게 내가 계획 없이 보낸 날이어서 더더욱 좋았다.


원래 나는 뭘 하더라도 계획을 미리 세워 두는 성격이다. 놀 계획조차도 미리 세워 두어야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어제는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휴가를 냈어서 계획을 세울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변수들이 겹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그저께 밤에 세워 둔 원대한 계획이 있기는 했다.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헬스장에 갔다가,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브런치를 요리해서 먹고, 근처 공원을 잠시 산책한 뒤 쇼핑몰에 가서 쇼핑을 하고, 쇼핑 도중에 맛있는 디저트도 먹고,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서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내가 어제 실제로 한 것은 딱 세 가지뿐이었다. 헬스장 가기, 샤워하기, 브런치 해 먹기. 늦잠을 자려던 계획은 어제 아침 서울시에 오발령된 안전 안내 문자 때문에 틀어졌다. 공원과 쇼핑몰과 영화관에 가는 계획은 집 근처 도로 교통이 통제되면서 포기했다. 교통 상황 때문에 친구가 놀러 오기도 어려워서, 친구와의 약속도 성사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어제를 이렇게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헬스장에 갔다가,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브런치를 요리해서 먹고, 그 브런치를 먹으면서 보려고 별 기대 없이 틀었던 넷플릭스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시즌3까지 다 보고, 저녁은 부모님과 함께 집 근처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다. 아침 일찍과 저녁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밍기적거리면서 보냈지만 너무나도 즐거웠다.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들었다. 여름 방학 동안 할 일이 없어서 집에 누워서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정주행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평일 낮 시간을 이렇게 여유롭게 보낸 것도 오랜만이지만, 그 시간을 이렇게 밍기적거리며 보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래서 특별했다.


어제는 계획한 대로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제가 만족스럽지 않았냐고 한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어제 내가 계획한 대로 하루를 보냈다면 어쩌면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쇼핑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영화를 보는 건 주말에도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침대에 엎드려 예상치 못하게 만난 재미있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시즌3까지 연속해서 보는 것은 지난 몇 년간은 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렇게 어제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기쁘다. 어제를 기쁘게 보냈기 때문에 오늘도 기쁜 하루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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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일,

버스에 앉아서 자잘한 소음들을 들으.



*커버: Image by Devin Kleu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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