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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n 08. 2023

[D-207] 적당히 재미없는 영화

159번째 글

적당히 재미없는 영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어제 저녁 나는 재미없는 영화가 필요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퇴근 중이었고, 지쳤었고, 피곤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최근엔 버스 안에서도 계속 일을 하곤 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노트북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게임을 하기에는 손목도 아프고 귀찮았고, 인스타그램 피드나 유튜브 쇼츠 같은 걸 들여다보기엔 좀 피곤했다. 손으로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쭉 볼 수 있는 걸 보고 싶었다. 자연스레 넷플릭스를 켰지만, 보던 드라마를 계속 보기에는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다. 나중에 보려고 찜해 둔 영화와 드라마들이 가득 있었지만 지금 보고 싶지는 않았다.


요약하자면 나는 너무 재미있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큰 자극은 받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보고 싶었던 영화나 명작이라고 소문을 들었던 영화나 재미있다고 추천받았던 영화는 집중해서 각 잡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가볍게 보고 깔깔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쇼는 끌리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편안한 자세로 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영상도 마찬가지였다. 시끄러운 버스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예전에 재밌게 봤던 걸 다시 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또 너무 지루할 것 같았다. 내게는 '적당히 재미없는 영화'가 필요했다. 영화에 몰입하지 않아도 되고, 잠깐 다른 생각을 해도 되고, 소리가 잘 안 들리거나 화면 연출이 잘 안 보여도 괜찮은, 그냥저냥 볼만한 적당한 영화. 조금은 뻔하고, 조금은 유치하고, 스토리가 다 예상이 가서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잊어버릴 수 있는 영화.


그래서 나는 넷플릭스 메인 화면을 별생각 없이 계속 내리다가 그냥 눈에 띄는 영화를 아무거나 골랐다. 처음 보는, 별로 안 좋아하는 장르의, 잘 모르는 배우들이 나오는, 처음 듣는 이름의 감독이 연출한, 평범한 썸네일과 제목을 가진, 그런 영화를 골랐다.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냥저냥 볼 만한 별로 특출난 점이 없는 약간은 지루한 영화였다. 하지만 딱 적당했다. 내가 찾던 바로 그 영화였다. 그 시간에 버스 안에 앉아서 보기에 완벽한 영화였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게 평범한 영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언제나 아주 재미있고 아주 잘 만든 영화가 보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영화가 오히려 꺼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모든 영화가 다 명작일 필요는 없고, 모든 영화가 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가슴을 뛰게 만들고 나를 흥분시킬 필요는 없는 거다. 빈틈없이 꽉꽉 채운 풍성한 영화가 끌릴 때가 있고 느린 호흡의 지루한 영화가 끌릴 때가 있고 정말 잘 만든 명작을 보고 싶은 경우가 있고 만듦새가 떨어지는 영화를 보고 싶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내 상황과 기분에 따라서.


생각해 보면 인생도 그렇지 않나 싶다.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풍성하고 자극적이고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할 필요는 없다. 매 순간 사건들로 가득할 필요는 없다. 잠시 쉬어 가는 순간들도 필요하고 단조롭게 흘러가는 날들도 필요하다. 별다른 일 없이 그냥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하루에 대해 평하자면 '평범하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평범한 날들도 인생에서는 필요하다. 그런 날들이 있기 때문에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견딜 수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의 100%로 몰입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런 적당히 재미없는 날들이 필요하다. 안정적이고 평범한 별일 없는 하루하루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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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8일,

식탁에 앉아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Somruthai Keawja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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