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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n 17. 2023

[D-198] 죽음을 준비해야겠다

168번째 글

내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새파랗게 젊고, 어디 크게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죽음을 미리 준비해두고 싶다.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니까. 그래서 유서도 몇 번 써 두었었고, 내 물건들을 정리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죽으면 SNS 계정들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 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너무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탓인지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 소홀했었다. 이젠 다시 죽음을 좀 준비해 보려고 한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든 이유는 지난 수요일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는 평생을 자식들과 손주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셨는데, 병으로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례를 치를 가족과 친지들이 편하도록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가셨다. 영정 사진도 몇 년마다 사진관에 가서 새로 찍으셨고, 액자에 넣기까지 해서 옷장 안에 보관해 두셨다. 수의도 미리 다 맞춰 놓으셨고 유골을 모실 납골당도 미리 자리를 예약해 두고 유골함도 사놓으셨다. 이 모든 게 정말 할머니다우셨다. 할머니는 원하는 것이 확고하신 할머니의 취향대로 미리 다 준비해 놓으셨고, 덕분에 가족들은 할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도 비교적 편하게 장례 준비를 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할머니는 장례 비용까지 미리 따로 통장에 마련해 두셨다. 그래서 이번엔 부의금도 정중히 사양하고 대부분의 지출을 할머니가 준비하신 비용으로 해결했다.


나를 정말 감동시켰던 것은 할머니께서 영정사진 액자 뒤에 붙여 놓으신 포스트잇이었다. 할머니는 액자 뒤에 이렇게 적어 두셨다.


"영원히 사랑하는 가족의 행복을 빌며 기쁘게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할머니는 심지어는 장례를 준비하는 가족들의 마음까지 헤아리셨던 거다. 가족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너무 안타까워하지 않도록, 할머니께서 기쁘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려고, 이런 메모를 남기신 거다. 이 포스트잇을 보고 얼마나 뭉클했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정말 멋진 분이셨다. 나는 정말 할머니를 존경한다. 나였다면 이렇게 하지는 못했을 거다.


어제 장례식이 끝났고, 이제 좀 정신없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나니, 나도 할머니처럼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가족들이 덜 힘들고 덜 고통받도록 미리 여러 가지를 준비하려 한다. 내일 죽을 수도 있고 10년 후에 죽을 수도 있고 100년 후에 죽을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해 놓고 싶다. 할머니처럼 멋지게 떠날 수 있도록.



/
2023년 6월 17일,
소파에 앉아서 TV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Mike Labrum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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