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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l 07. 2023

[D-178] 자책하지 말 것

188번째 글

어제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내 기분에 영향을 주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뭔가 평소와는 다른 하루를 보낸 것도 아니다. 하루 내내 기분이 나쁘고 울적하고 축 늘어지길래 왜 그런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이유 없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기분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어제는 내내 바짝 긴장한 상태로 말이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다녔다. 나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이 아닌데도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말을 함부로 쏘아붙인다던가, 감정적인 대응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던가, 말과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던가,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 어제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출근해서 일할 때는 물론이고 기분 전환을 위해서 저녁 늦게 영화를 보러 나갔을 때까지. 그렇게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로 주의하면서 다녀서 그런지, 다행히 별 일 없이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당연하게도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지쳐서 얼른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때부터 자책감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왜 내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 걸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이렇게 기분이 나쁜 이유조차도 왜 나는 알지 못하는 걸까. 무엇이 내 기분을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이런 자책들이 나를 괴롭혔다.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것은 이 기분 나쁜 상태, 이 울적한 상태의 원인을 나조차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원인을 모르니 해결할 수도 없고, 예방할 수도 없다는 점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나서 어제를 돌이켜 보니, 원래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우리는 주변의 영향력에 취약하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인해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궂은 날씨나 따가운 햇빛, 공기의 온도와 습도, 헝클어진 머리카락, 셔츠에 진 주름, 우리는 알지 못하는 호르몬의 작용이나 생활 리듬 등. 우리는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온도가 단 1도만 올라가도 기분이 울적해질 수 있고, 햇빛을 단 1분만 적게 받아도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다. 사람이란,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란, 이렇게나 예민하고 이렇게나 연약한 것이다. 원래부터 그렇다.


그러니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안 그래도 기분 나쁜 하루를 보냈는데, 왜 그런 하루를 보냈냐고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다. 때로는 이유를 몰라도 된다. 굳이 분석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어떤 것들은 예방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 것. 때때로 기분이 가라앉고 울적해지는 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과도 같기 때문에, 그때마다 굳이 자책하며 괴로워하지 말 것. 어제는 자책을 했고 오늘은 이렇게 다짐한다.



/
2023년 7월 7일,
버스에 앉아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Alisa Anto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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