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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l 08. 2023

[D-177] 우연한 인생

189번째 글

우리 집 앞 주차장에는 차 번호판이 내 전화번호 뒷자리와 똑같은 자동차가 있다. 내 전화번호가 010-1234-5678이라면, '5678'이라는 자동차가 집 앞에 한 대 서 있는 것이다. 이 집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이 자동차를 발견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차는 십 년이 넘도록 이 주차장을 지키고 있다. 척 보기에도 옛날 디자인의 각진 자동차가 내 전화번호 뒷자리와 똑같은 번호판을 달고서.


내가 이사 온 아파트 단지에, 내 전화번호 뒷자리와 같은 번호판을 단 자동차가, 하필이면 내가 사는 이 라인에, 내가 매일 지나가는 쪽 주차장에, 십몇 년 동안이나 비슷한 장소에 세워져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그다지 크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이 자동차가 여기 존재하게 되었을 테고, 정말 우연의 일치로 내가 이 아파트의 이 라인에 살게 되었을 테다. 나는 이 자동차가 눈에 띌 때마다 늘 우연이라는 삶의 요소를 생각한다. 내 삶이 얼마나 우연히 흘러왔고 얼마나 우연히 흘러갈지를.


작년에는 또 재미있는 우연이 하나 더 생겼다. 새로 들어간 팀에 나와 전화번호 앞자리가 똑같은 분이 계셨던 일이다. 내 전화번호 앞자리는 약간 특이해서,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나와 전화번호 앞자리가 똑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하필, 이 회사에서, 그것도 우리 팀에, 나와 전화번호 앞자리가 같은 분이 팀원으로 있었던 것이다. 팀원들의 연락처를 핸드폰에 저장할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우연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는 또 다른 사건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삶이 모두 내가 계획한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해냈다고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삶에는 우연적인 요소들이 크게 작용한다. 계획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다양한 무계획적인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게 된다. 우연, 운, 타이밍, 직감 등, 예측할 수 없는 조건들은 언제나 존재하고 꽤나 비중이 크게 존재한다. 이 삶 자체가, 이 우주 자체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만큼 오만하고 순진한 생각은 없다. 어떤 사건들은 정말로 우연히 벌어진다.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은 우연의 영역 밖,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아주 작은 영역뿐이다. 예를 들면 노력이나 용기 같은 것. 언뜻 보기엔 이 영역이 버거울 정도로 커 보여서, 도무지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지레 겁을 집어먹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 우연이라는 거대한 요소를 함께 넣어 계산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아주 작다. 내가 이 작은 영역만 어떻게 해 보면 된다고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해볼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만일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탓을 하며 우울과 절망에 빠져드는 것을 덜 하게 된다.


우연한 인생을 우연히 살아가는 나는 오늘도 우연히 기쁜 일들과 마주쳤고 그런 우연들이 더 자주 일어나게끔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
2023년 7월 8일,
소파에 앉아서 TV 영화채널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Ivana Cajin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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