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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l 09. 2023

[D-176]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썼다

190번째 글

어제의 에세이는 엉망진창이었다. 적어도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정리해 내지를 못했다. 그래서 횡설수설했고 두서없이 중얼거렸고 그냥 생각을 되는 대로 나열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첫 문단을 거의 다 썼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 문단을 쓰는 중에는 지금까지 쓴 내용을 다 지우고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도저히 일부를 고치는 것으로는 문제를 바로잡을 수가 없어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고 담아낼 일화와 비유를 정리하고 구성을 다시 짠 뒤에, 처음부터 다시 써 내려가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올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쓴 첫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을 지우지 않았다. 나는 그냥 문장의 순서나 내용을 조금씩만 수정하고 세 번째 문단을 되는 대로 써 내려갔다. 처음부터 글을 다시 쓰기엔,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엔, 내가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눈을 겨우 뜨고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어제 저녁 나는 피곤했다. 내가 이 두 문단을 적기 위해 사용한 시간과 에너지도 아까웠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대로 엉망진창인 글을 써서 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글을 올리고 나서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퀄리티의 글을 그대로 공개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잘못된 것을 알았고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는지도 알았으면서도 수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써서 글을 수정할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여전히 내가 너무 피곤했고, 기력이 없었고, 빨리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노트북을 덮고 불편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금세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깬 직후에도 나는 계속 어제 쓴 글을 생각하며 지금이라도 다시 쓸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에세이들은 내가 나 자신을 담아내기 위해서, 나 자신을 조금 더 잘 알기 위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굴 보여주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돈을 받고 쓰는 것도 아니고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으려고 쓰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글을 잘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엉망진창'으로 쓰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피곤한 것도,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은 것도, 횡설수설하는 글을 쓰는 것도 내 모습이고 감정이니까. 내가 나 자신을 좀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글을 그냥 그 상태 그대로 남겨 두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어도 그것도 내 일부이므로.



/
2023년 7월 9일,
소파에 앉아서 에어프라이어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Angelina Litvi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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