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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l 13. 2023

[D-172] 운을 점치는 일

194번째 글

나는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그날의 운을 점친다. 숫자를 하나 생각한 뒤,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 들어서, 그 숫자에 해당하는 페이지를 펼치고, 페이지에 적힌 첫 번째 단어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 단어가 그날의 내 운세다. 자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심심풀이처럼 한번씩 해 보곤 하는, 그런 별 것 아닌 의식 같은 거다.


오늘 아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이 의식을 한번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장에 다가가서 잡히는 대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오늘의 숫자는 173으로 정했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대수롭지 않게 173페이지를 펼쳤는데, 그 페이지의 첫 부분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공포.


그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이 의식을 치른 것을 후회했다. 오늘 하루종일 이 단어의 영향을 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별생각 없이 펼친 책이고 별생각 없이 점을 친 것이니까 별생각 없이 잊어버릴 수 있는 건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괜히 기분이 나쁘다. 왠지 찝찝하고, 왠지 신경 쓰인다. 오늘 무엇이 내게 '공포'를 가져다줄지, 무엇 때문에 내가 '공포'를 느끼게 될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들도 혹시 모를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후회했다. 오늘 하루종일 내가 '공포'에 시달리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나는 이 방식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탁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주인공은 신탁을 듣고 그 운명을 피해 달아나려고 시도하지만, 그 시도들이 오히려 그 운명을 향해 주인공을 끌고 가게 된다. 오늘 내가 '공포'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이런 식이 될 것 같았다. '공포'라는 단어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공포스러운 순간을 피하려고, 또는 공포라는 단어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런 내 시도들이 오히려 '공포'를 만들어내게 되는 거다. 그래서 결국 겪지 않아도 될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 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늘은 무사히 잘 흘러갔다. 비가 아주 많이 오긴 했지만 그래도 별일 없이 괜찮은 하루였다. 일이 좀 바쁘긴 했지만 평소와 비슷했고 견딜 만했다. 그냥 평범한 하루였다. 다른 날이었으면 오늘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침에 본 그 두 글자, '공포'라는 그 두 글자가 내 하루를 찝찝하게 만들어버렸다. 


내 운명은 내가 만드는 것이고 내 인생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신탁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사실이 된다. 내가 그 신탁을 듣고 그 신탁에 영향을 받아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역시 운을 점치는 일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 점괘가 맞아떨어지든 아니든 간에 그건 내 일상에 영향을 미치니까. 



/
2023년 7월 13일,
소파에 앉아서 스포츠 중계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Branimir Balogović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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