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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l 14. 2023

[D-171] 이해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195번째 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이, 더 정확하게, 더 가깝게, 이해한다는 뜻이다.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대충 알고 있던 것들을 직접 겪으며 자세히 알게 되고, 그렇게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더 많은 것들에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어릴 때 나는 책 읽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영화를 보는 것도, 공연을 보는 것도, 전시를 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가보지 못한 낯선 땅의 기후,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 열렬하게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는 커플의 이야기, 끝내 극복하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의 속내, 먼 옛날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 시대 사람들의 삶 등등. 나는 그런 것들을 읽고 듣고 보아서 알았다. 나는 그런 예술 작품으로부터 삶을 배웠다.


또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 삶을 배우기도 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 주변 어른들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삶을 이해했다. 누가 어떤 일을 겪었다더라, 어느 곳에 가 보았는데 이러이러한 것들이 좋았다,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린 시절의 나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넓혀 나갔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고 삶을 조금 더 살아가다 보니 이제 내가 직접 겪어서 아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동안은 내 좁은 삶의 범위 안에서 그냥 배워서 알았던 삶을 내가 직접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냥 막연하게 상상만 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린 시절에도 나는 돈을 벌면 세금을 내야 하고 연말정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하는지, 세금을 낼 때 내 기분이나 태도는 어떤지, 연말정산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매달 내 월급에서 세금을 떼어 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세금을 조금이라도 덜 내기 위해서 소득공제용 현금영수증을 매번 발급받는 경험과, 연말정산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캘린더 앱에 메모해 두는 경험이 무엇인지.


어릴 때는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간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 깊이 이해한다는 것. 예전에도 한 번 적었듯이, 인생의 해상도를 높여 간다는 것 (글 보러가기). 이렇게 세상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 법.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법. 나 자신을 더 잘 속이는 법.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 일. 그리고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느낀 감정들. 이런 것들은 영영 모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듯이 모든 앎에도 부작용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배우고 원하는 것만 이해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살다 보면 원치 않아도 배우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연 내일은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서 나의 이해를 더 깊게 해 주고 삶의 해상도를 올려 줄지,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싶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이고 싶다.



/
2023년 7월 14일,
소파에 누워서 TV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Tim Mossholder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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