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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11. 2023

[D-355] 좋아하는 데에 자격이 필요 있나

11번째 글

나는 좋아하는 것들이 정말 많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하고,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도 좋아하고, 뮤지컬도 좋아하고, 연극과 오페라도 좋아하고, 록 음악도 좋아하고, 클래식도 좋아하고, 신화도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하고…. 이렇게 정말 많은 것들을 좋아하다 보면 내가 과연 '마니아'로서, '팬'으로서, '덕후'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작품을 보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분석과 비평을 내놓기도 하고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기가 막히게 해석을 해내기도 하는데, 그에 비해서 나는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풋내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작품을 보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전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긴 한다.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일은 정말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니까. 그런데 내 '덕후'로서의 자격에 대한 고민은 내가 과연 그 좋아하는 것들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때 종종 찾아온다. 작품을 100%로 즐기기 위해서는 뒷받침되어야 하는 지식과 자질이 많은데, 내가 그런 지식이며 자질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면, 영화 한 편을 본다고 해도 그 영화를 '제대로' 보고 즐기려면 얼마나 알아야 하는 게 많은지 모른다. 우선 그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시대 배경을 잘 알아야 한다. 또 영화 속에 은유로 표현된 여러 사회적 이슈와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과 문화인류학적 요소들도 알아야 한다. 감독의 스타일, 이전 작품들, 촬영 기법, 출연배우들의 기존 이미지나 연기 스타일도 줄줄 읊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에 영향을 준 다른 영화들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어떤 장면에 어떤 연출과 기술이 쓰였는지를 알아볼 만큼 지식과 안목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영화계의 전반적인 흐름과 역사도 꿰고 있어야 한다. 과학도 마찬가지고 또 영화뿐 아니라 이 영화가 만들어진 상황,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지구의 모든 역사와 현상을 전부 다 알아야 하는 거다. 그래야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100%로 즐길 수 있다. 영화를 다 봐 놓고선 나 혼자만 영화에 담긴 의미나 감독의 의도나 수많은 비유들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본 거면 억울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면 내가 좋자고 하는 '덕질'마저도 스트레스가 된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속상해질 수밖에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 속상하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내 자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고작해야 이 정도밖엔 못 하면서, 어떻게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나, 하는 그런 생각.


이런 생각들이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안다. 내가 영화를 보고 좋았다면 이미 그걸로 그 영화를 100% 다 즐긴 거라는 것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감상이라고는 그저 "재밌었어." 한 마디밖엔 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이미 그 영화를 100% 즐겼다는 것을 안다. 뭔가를 좋아하기 위해서 어떠한 자격도 필요 없다는 것도 알고, 그냥 마음 편히 즐겁게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내가 워낙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욕심이 생긴다. 더 잘 알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은 욕심이다. 아무리 버리려 해도 이런 욕심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쓸데없는 고민과 괜한 욕심들을 배움의 원동력으로 삼으려고 한다. 어차피 못 버릴 욕심에다 피할 수 없는 고민이라면, 이용이라도 하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조금 더 잘 알고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하고 싶다. 이건 내게 좋아할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할 자격이라는 것은 없다. 좋으면 그냥 좋아하면 되는 거니까. 이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거다. 앞으로 더 많이 좋아하기 위해서.



/

2023년 1월 11일,

TV를 켜고 거실에 앉아서 가끔 화면을 흘깃거리며.



*커버: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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