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Jan 12. 2023

[D-354] 하필이면 나쁜 패를 고를 확률

12번째 글

오늘은 운 좋은 날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붕어빵 트럭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붕어빵을 좋아해서 겨울이면 늘 지갑에 현금 3,000원을 품고 다니는 사람인데, 2년 전쯤 집 근처에 있던 붕어빵 노점이 문을 닫은 이후로는 붕어빵을 구경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운명처럼 붕어빵 파는 곳을 지나친 것이다.


나는 당장 붕어빵 트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가족들과 나눠먹을 생각으로 붕어빵 8개를 샀다. 나도 그렇고 가족들도 그렇고 정통 붕어빵파라 슈크림보다는 팥 붕어빵을 좋아해서, 팥으로만 8개. 거기에 붕어빵 파시는 아저씨가 인심 좋게 하나를 덤으로 얹어 주셔서 총 9개의 붕어빵이 담긴 종이 봉지를 가슴에 품고 집에 도착했다. 아직 따끈따끈한 붕어빵을 품에서 꺼내서 펼쳐 놓고 가족들과 둘러앉으니 이제야 진짜로 겨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붕어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데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팥이 아니라 슈크림 맛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허탈하게 손에 든 붕어빵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는 붕어빵은 모두 팥이었는데 나만 슈크림이었다. 보아하니 아저씨가 덤으로 넣어 준 붕어빵이 슈크림 맛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9개의 붕어빵 중 1개만 슈크림이고 나머지는 팥이었는데, 내가 고른 붕어빵이 하필이면 슈크림 붕어빵이었던 거다.


9개나 되는 붕어빵 중에서 굳이 슈크림 맛을 집어 들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가 좋아하는 팥 붕어빵이 8개나 있는데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슈크림 붕어빵을 집을 확률. 나는 약간 슬퍼하며 슈크림 붕어빵을 다 먹고, 팥 붕어빵을 하나 더 먹었다.


슬프다고 적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2개의 붕어빵을 먹는 동안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오랜만에 붕어빵을 먹는다는 것이 즐거웠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붕어빵을 하나씩 입에 물고 있는 것이 즐거웠고 이 슈크림 해프닝에 대해 떠들고 웃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두 번째로 먹은 팥 붕어빵은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그러니까 삶이 내게 슈크림 붕어빵을 준다면 일단 그걸 맛있게 먹으면 된다. 불평하거나 괴로워하기보다는 일단 내게 주어진 붕어빵을 즐기는 것이다. 왜 내가 하필이면 슈크림을 골랐을까, 왜 나는 늘 이렇게 실수를 할까, 왜 나는 이렇게 운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만약 몇 초 전에 팥을 골랐더라면….' 이런 가정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되돌릴 수도 없는 데다가 슈크림 붕어빵도 맛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또 1개밖에 없는 슈크림 붕어빵을 해치우고 나면 팥 붕어빵을 집을 확률이 높아져서 좋다. 게다가 슈크림 다음으로 먹는 팥 붕어빵은 팥만 2개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만족스럽고 맛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슈크림 붕어빵 사건'이 오히려 더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팥 붕어빵만 2개 먹었더라면 오늘 이 일은 금세 잊혔을 수도 있고, 그냥 오랜만에 붕어빵을 먹어서 좋았다, 정도로만 사소하게 기억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하필 슈크림 맛을 집어 들었고, 덕분에 오늘 재미있는 추억이 하나 생겼다. 몇 년 뒤에도 9개 중에서 굳이 슈크림을 고른 나의 불운은 함께 웃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남을지도 모른다.


삶은 내게 슈크림 붕어빵을 주기도 하고 팥 붕어빵을 주기도 하고 2년간 붕어빵을 빼앗기도 하고 우연히 붕어빵을 다시 선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언제 어디서 붕어빵 트럭을 만날지 모르는 것, 그리고 어떤 붕어빵을 먹게 될지 모르는 것이 또 사는 재미이기도 하니까.



/

2023년 1월 12일,

침대에 기대앉아서 유튜브로 어제 세상을 떠난 제프 벡의 기타 연주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Kevin Engelke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355] 좋아하는 데에 자격이 필요 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