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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ul 20. 2023

[D-165] 완두콩 공주

201번째 글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완두콩 공주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어떤 공주가 비 때문에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공주를 위해서 모든 집의 매트리스와 이불을 모아서 가장 좋은 방에 여러 겹으로 푹신하게 깔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공주에게 간밤에 잠자리는 편안하셨냐고 물었는데, 공주는 매트리스가 너무 딱딱하고 불편해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공주가 떠나고 나서 매트리스를 치워 보자, 매트리스 아래 바닥에 완두콩 한 알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예민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는 그 완두콩 한 알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동화 <공주와 완두콩>을 조금 변형한 것이었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내게 지나치게 예민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만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아야, 좀 무던하게 살아야 편안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내가 아주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날이 서 있던 아이였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었던 것 같다. 이 완두콩 공주 이야기는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내 타고난 예민함 때문에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피곤함에 늘 젖어 있던 나는 별 것 아닌 일에 신경이 곤두서려 할 때마다 이 완두콩 공주를 떠올리며 무던해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런 내 노력도 의미가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보다는 조금 덜 예민하고 더 무던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지금 이 동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완두콩 공주의 잘못은 완두콩이 거기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꼈다는 점이 아니다. 완두콩 공주의 잘못은 뭔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이 매트리스 아래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가만히 누워서 밤새 잠을 설쳤다는 점이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 점.


사실 겹겹이 쌓인 매트리스 아래에서 완두콩을 감지한 것은 공주가 원해서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등 바로 아래에 완두콩이 있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무던한 성격을 가진 반면, 어떤 사람들은 열 겹 매트리스 아래의 완두콩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민감하다. 이런 성격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공주는 완두콩의 존재를 알아챘는데도 불편하다고 불평만 하면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공주는 매트리스를 헤쳐 보면서 대체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 완두콩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볼 수도 있었다. 완두콩을 빼내서 멀리 던져 버리고,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편하게 잠을 청할 수도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완두콩을 찾을 수 없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 뭔가 딱딱한 것이 있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것을 솔직히 밝히고, 그걸 찾아 없애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예민한 성격은 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평생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온 사람이지만, 때때로 이 예민한 성격 덕을 본 적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예민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지하는 일에 뛰어나고, 갑자기 닥칠 안 좋은 일에 미리 대비할 수 있다. 또 나는 예민하기 때문에 불편한 부분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세세하게 집어낼 수 있고, 그 부분을 지적할 수 있고,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예민함으로 인해 떠오르는 생각들, 이 민감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이다.


나는 실제로 잠을 잘 못 잔다. 편안한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쉽게 뒤척인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하는 완두콩은 내 열등감과 불안감과 자기혐오와 죄책감이다. 이런 감정들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잠 못 이루게 한다. 이 완두콩이 더 이상은 신경 쓰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내 일이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내 감정과 내 인생을 샅샅이 뒤져서 완두콩을 찾고 멀리 던져 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완두콩이 어디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고, 그 부분을 피해서 침대에 누워 잘 수도 있다. 아니면 완두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약간 마음을 놓고 잠에 빠져들 수도 있다. 아니면 완두콩이 거기 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완두콩과 함께 잠을 청해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완두콩은 어쩔 수 없으니 그건 내버려 두고 대신 방에 암막 커튼을 달거나 향초를 켜 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그냥 매일 똑같이 불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설칠 수도 있고. 그 선택은 내 몫이다. 완두콩 공주로 태어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 완두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완두콩이 나를 좀먹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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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0일,

버스에 앉아서 무언가가 삐걱이는 소리 들으며.



*커버: Image by Nicholas Barbaros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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