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Aug 03. 2023

[D-151] 한 단계까지만 내려가기

215번째 글

나는 상당히 감정적인 사람이다. 감정적이라는 건 기분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감정을 더 많이, 더 깊이 느낀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감정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이고,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감정적인 사람이라서 힘든 점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감정은 내가 원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느끼기 싫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감정은 그냥 찾아온다. 그리고 나를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든다. 그렇게 같은 감정 속에 잠겨 있다 보면 내 마음은 한 단계를 더 내려가고, 더 내려가게 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감정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점점 더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나보다 더 말을 재치 있게 잘하는 사람을 보고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고 하자. 이 '부러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 부러워하는 감정은 내가 느끼고 싶어서 느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을 보면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이 부러움은 때로는 나를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내게 동기부여를 해 준다. 하지만 너무 많이, 너무 오래 부러움 속에 잠겨 있다 보면 나는 한 단계를 더 내려가게 된다. 바로 자책 단계에 다다르는 것이다. 왜 나는 저렇게 못 할까, 왜 나는 이것밖에는 못 할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자책감'이라는 2단계 깊이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부터 조금 위험해지기 시작한다. 이 자책 단계에 있다 보면 또 한 단계를 더 내려가서 '무력감' 단계로 들어선다. 나는 절대 저렇게 할 수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다. 그렇게 무기력한 상태로 지내다 보면 이제 또 한 단계가 더 내려가서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감정은 부정적인 단계로 점점 깊어진다.


그래서 첫 단계인 부러움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부러움은 긍정적인 동기로 사용할 수 있지만, 자책과 무력감, 자기혐오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 이 감정들은 오히려 내 발전과 성장을 막고, 내가 할 수 없을 거라고 나를 속인다. 그냥 부러워하고 내 할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더 이상은 깊이 내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물론 감정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듯, 부러움이라는 1단계 감정을 느끼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다음 단계들로 내려가게 되기도 한다. 감정이라는 것이 원래 통제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쉽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2단계부터는 좋지 못한 생각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이고, 첫 단계에만 머무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습관적으로 몇 단계를 더 내려가는 것을 막아 볼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조금 더 빨리 걸어 나갈 수가 있다.


감정의 첫 번째 단계까지만 내려가기, 한 단계 덜 내려가기, 그런 습관을 들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

2023년 8월 3일,

버스에 앉아서 라디오 방송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Mat Napo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152] 더 넓고 더 효율적인 치료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