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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ug 06. 2023

[D-148] 날씨 탓일 거야

218번째 글

요즘은 날씨가 아주 기가 막히다. 안 좋은 의미로 기막히다는 뜻이다. 기온 자체도 30도를 훌쩍 넘어가는 데다가 습도까지 높아서 공기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밖에서 10분만 걸어도 답답하게 숨이 막혀오고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온도만 높거나 습도만 높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둘 다 높다 보니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 한마디로 정말 무더위 그 자체인 날씨이다.


그런데 이런 날씨의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모든 걸 날씨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보다 무기력하고 피곤해도 '날씨 탓일 거야.' 집중력이 떨어져도 '날씨 탓일 거야.' 괜히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어도 '날씨 탓인가?' 이유 없이 울적하고 기분이 안 좋아도 '날씨 때문에 그런가 보다.' 몸이 무거워서 그냥 누워만 있고 싶을 때도 '날씨 때문이겠지.' 이렇게 모든 걸 날씨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 지금 이 무더운 날씨의 유일한 장점이다.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길 수 있다는 점, 나를 자책하기보다는 다른 걸 탓하면서 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나는 다양한 감정을 아주 깊이, 아주 오래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흔들리고 많이 흔들리고 오래 흔들린다. 감정들은 나를 흔들고 나는 감정들에 휘둘린다. 나는 이 감정들로 인해 늘 불안하다. 나쁜 일이 생긴다면 왜 이런 나쁜 일이 내게 생겼을까를 오래 생각하고 모두 내 탓으로 돌리며 오래 괴로워한다. 좋은 일이 생기면 왜 이런 좋은 일이 나 같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인지를 고민하며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불안에 떤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날씨 탓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모든 일에 내 탓을 하면서 자책하고 나 자신을 한심해하며 어둠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모든 걸 다 날씨 탓을 할 생각이다. 나쁜 일이 생기면 '날씨 탓일 거야.'라고 그냥 잊어버리고, 좋은 일이 생겨도 '날씨 덕일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빨리 넘겨버릴 작정이다. 그래야 일희일비하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날씨 탓을 하고, 날이 추우면 추운 대로 날씨 탓을 하면서, 감정들이 표면만 살짝 스치고 흘러갈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면 내 마음이 조금 더 편할 것 같다. 불필요한 자책에 내 시간과 내 체력을 낭비할 일도 줄어들 것 같고.


조금 얕은 감정을 느껴도 괜찮을 때는, 이렇게 날씨 탓을 해야겠다. 



/

2023년 8월 6일,

소파에 앉아서 스포츠 중계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Ethan Robertso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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