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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Aug 17. 2023

[D-137] 무협지 속 캐릭터처럼

229번째 글

세상은 복잡한 것들 투성이다. 여러 학문 이론들도 복잡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일도 복잡하고,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도 복잡하고, 집에 와서 쉬는 것도 복잡하다. 그저 살아가는 일마저도 때로는 벅찰 만큼 복잡하다. 그래서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조금 단순하게 살고 싶다고. 한 가지만 바라보며 살고 싶다고.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세상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모든 무협지를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무협에는 공식이 있다. 그리고 무협지 속 인간관계에도 나름의 공식이 있다. 내가 부러운 것은 바로 이 인간관계 부분이다. 무협지의 인간관계는 아주 호탕하고 비교적 단순하다. 그리고 뒤끝이 잘 없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객잔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왜냐하면 서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싸우던 중 우연한 계기로 깨달았고, 또 서로의 실력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A와 B는 약간 부서진 객잔에 앉아서 함께 술을 마신다. 그렇게 한 번 술을 마시면서 웃고 떠들고 나면 서로를 위해 목숨도 내걸 수 있는 친구가 된다. 이렇게 형성된 의리는 웬만해서는 배반당하지 않는다. 어제 만난 사람이어도 오늘 그 사람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것, 그런 것이 무협 세상에서의 인간관계이다.


때로는 이런 무협지 속 캐릭터들처럼 인간관계를 맺고 싶다.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자연스레 사이가 멀어진 친구를 찾아가서 칼을 뽑아 들고 몇 합을 겨루다가, 호탕하게 "하하하! 자네는 여전하군!" 하며 풀밭에 털썩 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번의 호의를 베푸는 것만으로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반대로 누군가 내게 베푼 단 한 번의 호의만으로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형은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칠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가 대형을 오해했습니다."라고 하며 목례를 나누고 싶다. 그러고 나면 다시는 그 사람과 소원해질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때로는 무협지 속 캐릭터들처럼 행동하고 싶다. 가슴에 넘치는 의협심을 담고, 내가 믿는 것이 옳다고 의심하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갈고닦는 일에만 열중하고 싶다. 그저 그게 옳다는 이유만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를 갖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걸 뒤로하고 떠날 수 있는 모험심과 초연함을 갖고 싶다.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바치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태도를 갖고 싶다.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 없이 도움을 주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길을 떠날 수 있는 아량과 배포를 갖고 싶다. 그리고 어느 결정적인 순간 그 사람과 다시 재회하고 싶다. 재회한 그 사람과 반갑게 인사하며 "이것 참 대단한 인연이로군요!" 같은 말을 주고받고 싶다. 그런 인연을 갖고 싶다. 그런 인연을 만들 수 있는 올바른 마음을 갖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강호의 삶과는 다르다. 현실의 삶은 이보다 더 복잡하고 이해관계로 엉켜 있으며 어두운 욕심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무협지 속 캐릭터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조금 흉내를 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겉핥기식으로 아주 약간만이라도. 의로운 마음과 올곧은 신념을 가져 보려고 애써 보고, 대가 없는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해 보면서 말이다. 언제나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아주 가끔씩은 본받을 만한 부분들만 따 와서 살짝 흉내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게 한번 해 보고 싶다.



/

2023년 8월 17일,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 팬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Robynne Hu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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