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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15. 2023

[D-351]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

15번째 글

*최근 개봉한 영화 <장화 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Puss in Boots: The Last Wish)>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용기란 두려움도 공포도 없이 오늘만 사는 것처럼 위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라고. 용기는 오히려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도, 수십 수백 번을 갈등하고 도망칠까 고민하면서도, 벌벌 떠는 다리를 들어 힘겹게 한 걸음을 겨우 내딛는 것에 가깝다고. 이렇게 한 발짝 내딛는 보통 사람들의 작은 용기들이 모여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이다.


영웅도 마찬가지다. 영웅은 단순히 남다른 재능과 능력을 가진 것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수많은 영웅 신화들이 보여줬듯이, 또 여러 히어로 영화들이 보여줬듯이, 영웅을 만드는 것은 그들이 해내는 용감한 행동이다. 그리고 영웅들의 이런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오만함이 아니라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투지에서 나온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결국 패배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맞서는 것이 두렵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을 계속하겠다는 굳은 결심에서.


이미지 출처: Universal Pictures


<장화 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에서 주인공 푸스는 스스로를 '두려움을 모르는' '죽음 따위는 비웃어 버리는' 전설적인 영웅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재앙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왔을 때 푸스는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만다. 이 죽음의 그림자는 계속해서 푸스를 쫓아다닌다. 푸스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숨어버리거나 목숨을 되찾으려고 소원의 별을 찾아 헤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푸스는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죽음에게서 도망치지 않는다. 다급히 소원을 빌지도 않는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기를 멈추고 당당히 맞서서 싸움을 시작한다.


푸스가 이렇게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두려움을 모르는 전설의 영웅'이라는 스스로의 타이틀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 푸스는 그동안 스스로와 주변을 갉아먹어 왔던 자기애와 오만함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자신 곁의 소중한 친구들을, 이번 생에서 그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들을 떠올린다. 그는 더 이상 죽음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결심한다. 삶과 죽음을 우습게 여겼던 지난 8번의 생과는 달리, 이번 생에서는 지금 이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노라고. 죽음이 눈앞에 닥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겠노라고.


그리고 푸스가 이렇게 결심하며 싸움을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진다. 푸스가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푸스가 이 두려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푸스가 도망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며, 매일매일이 죽음과 싸워나가는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푸스는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올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 지금 내 곁의 소중한 이들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으며 진정한 영웅이 된다. 영웅이기를 포기했기에 영웅이 된 셈이다.


"지금 내게 단 한 번의 삶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삶을 소중히 여길 거야. 너와 함께 하는 지금 이 삶을." 영화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마음에 깊이 들어와 박힌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왜인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The Impossible Dream'이 생각났다. 특히 노래의 마지막 부분인 아래 가사가 떠올랐다.


This is my quest, to follow that star
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To fight for the right without question or pause
To be willing to march into hell for a heavenly cause

이 별을 쫓는 것이 내게 주어진 소명이오.
일말의 희망도 없고, 너무나도 멀지라도,
의심하거나 멈추지 않고 정의를 향해 나아가며
천국의 대의를 위해서 기꺼이 지옥으로 행진하는 것.

And I know if I'll only be true
To this glorious quest
That my heart will lie peaceful and calm
When I'm laid to my rest

그리고 나는 알고 있소, 이 영광스러운 소명을
내가 진실되게 마주할 수 있다면
쓰러져 죽음에 이르더라도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으리라는 것을.

And the world will be better for this
That one man, scorned and covered with scars
Still strove, with his last ounce of courage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그리고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
괄시를 받고 흉터로 뒤덮인 한 사람이
마지막 한 줌의 용기를 꺼내 분투하며
닿을 수 없는 별에 닿고자 하기에.

- 'The Impossible Dream' 중에서.


진정한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면서도 나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

2023년 1월 15일,

소파에 기대 누워서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Jo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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