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Jan 16. 2023

[D-350]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버릇

16번째 글

나는 무슨 일을 하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변기를 볼 때마다 핸드폰을 변기에 빠트리는 상상을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줄지어 탄 사람들이 와르르 넘어져 아수라장이 되는 상상을 한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무조건 비행 도중에 추락해서 죽는 상상을 한다. 아니면 다 죽고 나 혼자 살아남는 상상이라던지. 또 직장에서 문서 작업을 할 때면 갑자기 정전이 되어서 내가 작업한 모든 파일이 다 날아가는 상상을 하고,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면 오늘 내게 사고가 나서 저녁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상상을 한다.


이런 상상은 너무 당연하게 내 일상 속에 들어와 있어서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부정적인 상상을 하니까 부정적인 에너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이 피곤해지고 더 빨리 지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생각이란 것이 원래 안 하려고 할수록 더 떠오르는 성질이 있어서 쉽지 않았다. 내게 왜 이런 버릇이 생겼는지를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래전부터 그랬기 때문에 언제부터 시작된 버릇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어릴 때부터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보통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나처럼 많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내 버릇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듣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의외로 이렇게 안 좋은 상상을 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내가 정도가 조금 심할 뿐, 사실은 인간의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는 심리라고.


동굴에서 살던 시절부터 인간은 늘 위험을 피하고 조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조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들을 미리 예측해야 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순간 일어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미리 파악하고, 미리 대비하고 주의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 성향 때문에 인간은  그 순간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상황들을 떠올리면서 그 상황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고 조심하려고 한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동굴에 들어갈 때 안에 사나운 짐승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 미리 뗀석기를 들고 싸울 준비나 도망칠 준비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 현대로 치환해 보면, 지하철을 탈 때 승강장 틈새에 스마트폰을 떨어트리는 생각을 한 사람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도록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거나 더 꼭 쥘 수 있고, 결과적으로 스마트폰을 떨어트릴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하루 종일 최악을 상상하는 나는 아주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실제로 내 일상에 도움이 된다. 나는 변기에 핸드폰을 빠트리는 상상을 하기 때문에 미리 안전한 곳에 핸드폰을 올려놓는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안전사고가 나는 상상을 하기 때문에 손잡이를 꼭 잡고, 비행기가 추락하는 상상을 하기 때문에 대피 요령을 숙지하고 미리 탈출 및 생존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린다. 또 작업하던 문서를 다 날리는 상상을 하기 때문에 Ctrl+S를 자주 눌러서 미리 저장해 둔다. 그리고 집을 나서는 이 순간이 내가 가족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아침마다 꼭 엄마, 아빠, 언니의 얼굴을 보고 좋은 하루 되라는 말과 굿바이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간다.


희망을 갖고 낙관적으로 사고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마음가짐인 것처럼, 불운과 불행을 떠올리며 두려워하는 것도 생존에 필요한 일이다. 어쩌면 최악을 상상하는 내 '나쁜' 버릇이 나를 지금까지 살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기쁨이 나를 살아가게 하고 공포가 나를 구해 주는 셈이다. 내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

2023년 1월 16일,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엔진과 바퀴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Dominic Wunderlich from Pixabay

작가의 이전글 [D-351]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