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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17. 2023

[D-349] 지하철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17번째 글

나는 평소에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방법도 있고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는데, 버스가 조금 더 빠르고 덜 붐벼서 대체로 버스를 타는 루트를 선택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지하철과 버스 중에서 지하철을 더 좋아한다.


지하철을 좋아하는 데에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지하철은 하차벨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내릴 정류장을 지나칠까 봐 여기가 어디인지를 계속 확인하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차벨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을 필요도 없고. 승차할 때도 더 편하다. 버스정류장에는 여러 버스가 오고 가기 때문에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를 확인하고 지켜봐야 하는데 지하철은 승강장만 제대로 찾으면 그다음부턴 그냥 문 앞에 서 있다가 타기만 하면 된다. 또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나의 존재를 기사님께 어필해야 한다. 잘못하다간 나를 못 보고 그냥 가버리거나 내가 안 타는 줄 알고 지나쳐 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편히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보고 앞으로 나서거나 해야 하는데 지하철은 그러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그리고 지하철은 역과 역 사이를 이동할 때 늘 같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도로 상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또 정해진 시간에 오고 가니까 버스처럼 미리 시간을 체크하고 나갈 필요도 없다. 역이 대부분 실내이기 때문에 비가 올 때도 편하다. 화장실이 급하면 내려서 해결할 수도 있고, 목이 마르면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실 수도 있고, 편의점에 가거나 간식거리를 사 먹을 수도 있다.


이런 여러 이유들 때문에 나는 일반적으로 지하철을 버스보다 더 선호한다. 비록 매일 출근할 때는 버스를 타고 있긴 하지만.


오늘은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탔다. 집을 나서기 전에 지도 앱으로 확인해 보니 차가 많이 막히는 건지 버스가 17분이 지나야 온다기에. 그래서 오랜만에 지하철역에 서서 차가 들어오는 걸 보면서 내가 왜 지하철을 선호하는지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편리함이나 위에 나열한 다른 현실적인 이유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다가 조금 더 본질적으로 파고들어 보았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지하철을 좋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하철은 자기만의 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하철은 선로를 따라 움직인다. 이 선로로는 다른 자동차나 트럭이나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다니지 않는다. 지하철에게는 자기만이 갈 수 있는 자기만의 길이 있다. 그래서 지하철은 특별히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은 차가 막힐 일도 없고 늦을 일도 없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떠나기만 하면 된다. 선로가 있고 시간이라는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역도 생기고 여러 편의시설도 생긴다. 지하철은 이 역들을 오가며 달린다. 어떤 역에서는 수백 명이 타고 어떤 역에서는 단 한 명도 타지 않겠지만 지하철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지하철은 나를 태워가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역에서는 당연히 멈춰야 하기 때문에 멈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생이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버스보다는 지하철처럼 살아가고 싶다. 나만의 길을 갖고, 나만의 속도를 갖고, 나만의 이유를 갖고, 너무 많은 것들을 두리번거리지 않으면서 묵묵히 달리고 싶다. 몇 명이 스쳐 지나가던 상관없이. 누가 내게 무슨 말을 하던 흔들리지 않고. 누가 나를 판단하고 비난하던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내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 나가고 싶다. 내 인생의 한 역에서 다음 역으로 열심히 달려 나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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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7일,

책상 앞에 앉아서 배경음악처럼 들으려고 틀어 놓은 <슈렉> 대사들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Martin Winkl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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