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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Sep 11. 2023

[D-112] 어린왕자식 자기소개

254번째 글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보면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고 정말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새로운 친구를 소개할 때에도 그 친구의 나이처럼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야 알아듣고, 정말로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사실들은 물어보지 않는다고 말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어른들에게 말하면, 어른들은 도무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그 애도 나비를 채집하니?" 절대로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그 앤 나이가 몇이지? 형제들은 몇이나 되고? 몸무게는 얼마지? 그 애 아버지는 얼마나 버니?" 항상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묻고 나서야 어른들은 그 친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나는 아주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는데요, 창문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 비둘기가 있고……" 이런 식으로 어른들에게 말한다면, 어른들은 그 집을 상상해 내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비로소 그들은 소리친다. "정말 예쁜 집이겠구나!"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나만 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라고 하면 아마 숫자를 줄줄 늘어놓을 것 같다. 나이는 몇이고, 형제는 몇이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그 직업을 가진 지 몇년차이고 등등.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자기소개에서 숫자가 들어있지 않은 정보들은 거의 없다. 나도 '어른'이 된 지 꽤 오래된 탓에 벌써 어른의 문화에 물들어 버린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자기소개는 어른들의 자기소개뿐이다.


그래서 어린왕자식 자기소개를 한번 적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에 대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나를 소개해 보기로 말이다. 


"저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좋아해요. 어떤 대상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가는 것도 좋아하고요.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면서 영화관에 앉아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공연장에서 불이 꺼지는 순간마다 즐겁다고 느껴요. 저는 노래를 들을 때 심장이 뛰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를 좋아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하는 사람이고요. 또 저는 때로는 낯을 가리고 때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대하는 조금 변덕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죠. 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내가 고민해서 적어 본 것은 겨우 이 정도다. 이 외에는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들을 쭉 적어 내려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자기소개에 쓰기에는 부적절하다. 결국 나의 취향과 관심사, 감정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생각보다 쓸 말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나는 나에 대해서 생각보다 잘 모르고 있구나.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고 있다고. 아니면 적어도 나는 나를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오늘 추가로 알게 되었다. 이 말을 자기소개에 추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것이 낯설어서, 늘 어떻게 나를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저는 저에 대해서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를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저예요."



/

2023년 9월 11일,

식탁에 앉아서 창 밖 소음들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Marcos Rivas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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