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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Sep 12. 2023

[D-111] 빼앗고 또 빼앗으며

255번째 글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죄스럽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나보다 더 나은 많은 사람들이 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람들이 아닌 내가 더 살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우주가 왜 이렇게 돌아가야 했던 것인지, 왜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죽고 싶다거나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나는 우주의 미스터리이다.


이 죄책감은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가져야 했던 것들을 빼앗아 왔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졌어야 하는 것을 빼앗으면서 살아왔다. 내가 태어남으로 인해서 부모님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다른 선택지를 빼앗으며 태어났다. 그분들의 선택이었고 내 의지가 아니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나의 존재 자체가 부모님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을 방향을 차단해 버린 것은 맞다. 그분들의 인생은 다른 길로 흘러갈 수도 있었지만 나라는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이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또 내가 태어나면서 나는 언니에게 갔어야 할 관심과 사랑을 일부분 빼앗아 왔다. 물론 언니는 동생을 얻게 되었지만, 나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희생하고 포기해야 했다. 내가 없었으면 언니가 받지 않아도 되었을 스트레스들도 추가적으로 주게 되었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존재 자체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 버리게 되었다. 내가 존재하기를 지속하기 위해서 나는 가족들과 친척들, 친구들, 나를 둘러싼 다양한 공동체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빼앗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세상의 자원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없었으면 소비되지 않았을 돈, 물건, 지구의 자원들이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소모되어 버렸다. 나는 지구의 일부를 빼앗고 착취하면서 살아남았다.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들이 나를 살려놓기 위해서 낭비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을 끊임없이 빼앗으면서 살아왔다. 그것이 내게 죄책감을 안겨 준다. 살기 위해서 늘 빼앗았는데, 내가 그럴 만큼의 가치를 세상에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죄책감이 드는 것 자체가 또 죄스럽다는 사실이다. 이렇게나 많은 희생과 이렇게나 많은 탈취 속에서 자라온 내가 행복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에 또 죄책감이 든다. 이렇게 빼앗으면서 살았으면 보란 듯이 아주 잘 살기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한다. 분명 행복을 의식하지 않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도 버리자고 결심했었는데(글 보러가기) 이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서는 아주아주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다. 살려놓을 가치가 있는 삶을, 매일매일이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하는 것뿐이다. 감사를 한다면 내게 주어진 삶은 빼앗아 온 것이 아니라 빌려오거나 받아온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만 하면 되는 거다. 내가 늘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그저 세상이 기꺼이 내어 준 이 호의에 감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 같다. 그게 좀 덜 빼앗는 방법일 것 같고, 좀 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그러니 그저 감사하며 사는 수밖에. 어제도 오늘도 내게 삶이 주어졌음에 그저 감사하는 수밖에.



/

2023년 9월 12일,

버스에 앉아서 버스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Herbert Grambihler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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