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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Sep 14. 2023

[D-109] 감정은 흘러가야 한다

257번째 글

나는 너무 자주 어떤 감정이나 기분에 사로잡힌다. 기쁨이나 슬픔 같은 명확한 것들 말고도 아주 다양한 느낌들이 나를 채우곤 한다. 왠지 지금 이걸 꼭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가라앉는 텐션, 갑자기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진 신경, 어느새 마음을 가득 채워버린 걱정이나 죄책감 같은 것들. 이런 감정과 기분들은 때때로 나를 찾아오고, 그러면 나는 이런 느낌에 사로잡혀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에 잠기고 만다. 그 기분에 잠식당해 있는 것이나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에 휩쓸려서 잠시 정체되곤 하는 것이다.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내가 이렇게 감정에 자주 사로잡히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감정을 '결과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겐 감정이 어떤 상황의 결과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서,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건지 원인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다음 감정, 다음 기분으로 빨리 넘어가지 못하고, 빨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거기 정체되어 있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그런데 감정은 결과가 아니라 지표인 것 같다. 내가 다음 행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단서, 증거, 지표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감정이다. 통증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뜨거운 냄비를 실수로 맨손으로 잡았다면, 나는 뜨거움과 고통을 느낄 것이고, 그 결과 냄비에서 얼른 손을 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통증은 결과가 아니라 지표로 작용한다. 내가 만약 통증을 결과로 받아들인다면, '뜨겁다.' '아프다.' 같은 감각을 느끼며 가만히 있을 것이다. 그게 냄비에 손을 가져다 댄 결과니까. 하지만 이 통증을 나는 "얼른 거기서 손을 떼!"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손을 떼서 더 큰 화상을 방지할 수 있다. 통증은 지표이고, 손을 떼는 행동이 결과인 것이다. 


감정도 이런 뜨거움이나 고통처럼 작용한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결과가 되면 안 된다. 그 감정에 너무 오래 잠겨 있으면서 다음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내가 다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을 지표처럼 받아들이고, 일련의 처리 과정을 거쳐서 흘려보내야 한다. 감정이 느껴지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를 생각하고 마음속에서 프로세싱을 한 뒤 행동을 취하고, 이 처리 과정이 끝나면 그 감정은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역할을 다한 감정을 제때제때 정리해 주지 않으면 처리 과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결과가 아니다. 수확해서 마음에 저장해 두어야 하는 생산물이 아니다. 감정은 진짜 결과인 행동과 내일을 도출해 내기 위한 처리 과정에 필요한 재료이자 지표이다. 감정은 나를 거쳐 흘러가야 하는 것일 뿐이다. 내 마음으로 들어오고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한다. 감정이나 그 부산물이 남아 이 처리 프로세스를 정체시키거나 고장을 내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

2023년 9월 14일,

책상에 앉아서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Crystal Kwok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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