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Sep 17. 2023

[D-106] 한 꺼풀 벗겨내면

260번째 글

귤 껍질을 벗기면 속의 알맹이가 나온다. 양파를 한 겹씩 한 겹씩 벗겨내면 가장 가운데의 심지가 드러난다. 선물 포장을 벗기면 상자가 나오고, 상자를 열면 선물을 집을 수 있다. 캔버스 위에 덧칠된 페인트를 한 겹 벗겨내면 그 아래에 그려진 진본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한 꺼풀 벗겨내는 일은 핵심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과정이다.


나의 생각과 의도도 한 꺼풀씩 벗겨내다 보면 진심이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면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과연 나의 목표일까? 내가 원하는 것은 재산일까? 전혀 아니다. 돈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단일 뿐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에서 한 꺼풀을 벗겨서,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면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온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돈을 쓰고도 과연 그렇게 돈을 써도 되는지 걱정하지 않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 삶 자체도 나의 목표는 아니다. 여기서 한 꺼풀을 더 벗겨내야 한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은 욕망이 나온다. 내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일, 새로운 경험들, 억지로 하지 않을 수 있는 일들. 그런 걸 하면서도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안정성과 행복이었다. 돈이 아니라. 몇 겹씩 마음을 벗겨내 보면 알 수 있다.


나 자신의 본질도 이런 식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겹씩 한 겹씩,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들을 벗겨 보는 것이다. 그렇게 떼어낼 수 있는 것을 다 떼어내고 걷어낼 수 있는 것을 다 걷어내면 나의 본질만이 남을 것이다. 나의 가장 중심,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껍질을 벗겨내려면 계속해서 주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연습을 말이다. 우리는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고, 늘 더 받고 계속 받고 더 가져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렇게 받기만 하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걸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껍질이 점점 두터워지고 겹겹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완전한 상태는 더 이상 더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를 더욱 완전에 가깝게 만들려면 껍질을 계속 벗겨내서 더 이상은 벗길 수 없는 그 본질의 상태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비교적 덜 중요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내려놓고. 그러다 보면 한 겹씩 껍질이 벗겨질 것이다. 진실로 나는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2023년 9월 17일,

소파에 앉아서 TV 음악 프로그램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Yannis Papanastasopoulos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107] 완벽하지 않았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