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Sep 18. 2023

[D-105] 에스컬레이터에 거꾸로 타서

261번째 글

인생은 에스컬레이터를 역행해서 올라가는 것과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올라갈 때처럼,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려면 더 빠르게, 더 열심히 올라가야만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주르륵 미끄러진다.


갑자기 이런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아침 재 본 인바디 때문이다. 지난 몇 주간 열심히 운동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의 인바디 결과는 전과 비교해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원래 운동이든 공부든 뭐든 직선 궤도를 따라서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훅 계단식으로 난다고는 하지만, 오늘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다. 기껏해야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 지난 몇 주간 꾸준히 노력한 건가 싶어서 맥이 빠진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몸살이 나서 일주일 정도 운동을 하지 못했을 때는 곧바로 근육량이 떨어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마치 아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타고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고 가만히 있으면 내려가게 된다. 같은 자리에 정체되어 있기 위해서는 미친 듯이 달려야 한다. 올라가는 것은 쉽지 않은데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멈추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새 더 낮은 곳에 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인생은 에스컬레이터를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게 우주의 섭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이 없다면 에너지는 저절로 높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언제나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우주는 정말로 역행하는 에스컬레이터 구조가 맞을 수도 있다. 언제나 더 낮은 상태로 가고 싶어 하는 우주의 거대한 흐름을 내가 거슬러 올라가려고 애쓰는 상황이 진실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비유이므로, 여기에 정확한 과학적 잣대를 들이밀지 말길 바란다.)


하지만 또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서 끊임없이 뭔가를 해보고 있다. 나의 가장 안정적인 상태는 아마 생명이 빠져나간 상태일 것이다. 죽은 나는 예측 가능하니까. 일단 죽고 나면 나는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고 어떠한 에너지의 흐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위로 오르고자 시도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정체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살아 있는 나는 저 밑으로 나를 내려보내려는 이 우주에 맞서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나는 온 우주와 맞서는 위대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삶은 꽤나 멋진 것 같다. 나는 꽤나 대견한 존재인 것 같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기특한 일인 것만 같다. 그리고 계속해서 삶을 지속해 나가는 일은 정말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대단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살아 있음으로써, 그 자리에 있지 않기 위해서 뭐라도 해 보는 존재다. 



/

2023년 9월 18일,

버스에 앉아서 라디오 음악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Teemu Laukkarinen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106] 한 꺼풀 벗겨내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