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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Sep 26. 2023

[D-97] 책 잡히고 싶지 않아서

269번째 글

학창 시절에 나는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숙제는 꼬박꼬박 잘해 갔고, 지각을 해본 적도 없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에 앉아서 교과서를 꺼내놓았었고,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도 거의 사 먹지 않았고, 심지어는 만화책도 보지 않았다. TV도 많이 보지 않았고 게임도 거의 하지 않았다. 교복을 몸에 딱 맞게 줄여 입는 게 유행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파마나 염색을 하지도 않았다. 화장도 하지 않았다. 복장 규정이 엄격한 학교를 다녔어서 어두운 색 외투에 구두를 신고 다녀야 했는데, 그것도 꼬박꼬박 지켰다. 나는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그런 타입의 학생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던 것은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옳아서라거나 학생의 본분이라서거나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신념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단지 번거로운 일이 생기는 것이 싫었다. 선생님에게 혼난다거나, 선도부에게 걸린다거나, 벌점을 받는다거나, 그런 안 생겨도 될 일을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삶에 그런 이벤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은 그런 식으로 굴러갔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사는 삶. 귀찮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들. 편하게 살기 위해 취하는 태도. 그래서 내가 옳은 일을 했다면 그 이유는 대체로 '그게 옳아서'라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같은 게 아니라, '괜히 책 잡히기 싫어서'였다. 신념을 갖지 못한 채로 그냥 그렇게 흘러가듯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나 비겁하게.


물론 이런 몇 마디로 내 삶을 요약할 수는 없다. 지금도 내가 나를 납작하게 만들고 마음대로 정의 내리면서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이 '책 잡히기 싫어서'라는 것만은 사실이다. 일을 제시간에 맞춰서 끝내는 것도 괜히 한소리 듣기 싫어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괜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서, 약속 시간을 꼬박꼬박 지키는 것도 괜히 뒤에서 말이 나오는 것이 싫어서. 이런 식으로 나는 편하게 살기 위해서 본의 아니게 '착하게' 살아왔다.


이 동기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 올바른 일을 하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잘 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다. 나는 진심인 것처럼 꾸며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나를 위해 하는 일인데 그게 배려심이나 성실함에서 나오는 거라고 다른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 뿐이다. 어떻게 하면 이 이기적이고 비겁한 동기를 신념으로, 의지로, 윤리로 만들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조금씩 익숙해져서 몸에 배게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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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6일,

버스에 앉아서 차가 가다 섰다 하는 소리 들으며.



*커버: Image by MChe Lee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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