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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Sep 27. 2023

[D-96] 낭만을 잃어버린 걸까

270번째 글

어린 시절엔 막연하게 동경했던 것들이 많았다. 멋지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예를 들면 시골 전원생활이 그랬다. 나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밤에는 불이 켜지지 않는 동네에서 사는 것을 꿈꿨다. 집 마당에는 커다란 나무와 온갖 꽃들이 우거져 있고, 작은 텃밭도 가꾸고, 집 앞에 평상도 가져다 놓고 그 위에서 가끔씩 낮잠을 자기도 하고, 근처 개울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내 허리까지 자란 풀밭을 헤치며 산책을 하고. 그런 상상을 하면서 나는 그 생활이 정말 낭만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영화를 보듯 나는 그런 풍경 속의 나를 상상했었고, 거기서 낭만을 찾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그런 곳에서 전원생활을 시켜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 같다. 이런 상상 속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탓이다. 마당에 꽃과 나무가 우거져 있으면 아마 벌레도 많을 것이다. 나는 벌레를 끔찍이도 싫어하므로 아마 그걸 견디지 못하고 마당을 콘크리트로 깔아 버릴지도 모른다. 텃밭을 가꾸는 것도 보통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취미로 이따금씩만 들여다보아서는 안 되고 매일같이 노동을 해야 겨우 수확다운 수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집 앞 평상에서 낮잠을 자면 내 주변에 날벌레들이 날아다닐 테고, 집 근처에 개울이 있다면 그건 여름에 모기에 내내 시달리게 된다는 뜻일 거다. 허리까지 자란 풀밭은 진드기나 여러 병균을 내게 옮길지도 모른다. 나는 벌레도 싫어하고 체력도 약하고 식물을 키우는 것도 영 재능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오게 될 것이 뻔하다.


이런 걸 알아서 그런지, 이젠 더 이상은 전원생활이 그다지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에서 나는 낭만을 잃어버렸다. 배낭 하나만 메고 하는 세계여행이라던지, 오지로 떠나는 탐험이라던지, 심지어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상상까지도. 더는 이런 것들이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공상을 하는 대신에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낭만보다는 나의 안전, 편안함, 피로도, 가성비 등을 더 먼저, 더 많이 따지게 되었다.


아마 이건 내가 자라면서 알게 된 것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마치 동양을 신비로운 미지의 나라로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한 갈래처럼 말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막연한 환상이 생기고, 거기에서부터 낭만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갖고 있던 낭만은 어느 정도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낭만이므로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이 배우고 현실을 알게 되면서 당연히 이 낭만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낭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전에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은 그렇지 않게 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낭만을 갖게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꿈에 대한 낭만 같은 것. 꿈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에, 얼마나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인지를 알기에,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어린 시절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욱 낭만적이다. 이루어질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꿈을 위해 기꺼이 걸음을 옮기고 그러다 이루지 못하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이 마음가짐은 낭만 그 자체이다. 또 호캉스의 여유나 콘서트 현장의 열기 같은 것들도 예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낭만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나는 어떤 낭만은 잃어버렸지만 새로운 낭만을 찾게 되었다. 보다 현실적이고 가까운 낭만을, 보다 잘 아는 낭만을 말이다.



/

2023년 9월 27일,

침대에 기대앉아서 잔잔한 노래 들으며.



*커버: Image by Mathew Schwartz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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