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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02. 2023

[D-91] 허무한 엔딩을 맞이하더라도

275번째 글

요즘 가족들과 함께 챙겨보던 드라마가 어제 끝났다. 허탈하다. 드라마가 끝나서 허탈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가 잘 끝나지 못해서 허탈하다. 용두사미라고 해야 하나, 처음엔 이야기를 잘 끌어 오다가 마지막에 삐끗해서 황당하고 허무한 결말로 마무리되어 버렸다. 그렇게 엔딩을 맞고 나니 결말이나 내용을 곱씹기는커녕 그동안 내가 이 드라마를 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 드라마에 쏟은 내 시간과 정성이 아까웠다.


하지만 결말이 나기 전까지 나는 이 드라마 덕분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내가 허탈함에 잠겨 있는 상태이더라도, 엔딩이 허무해서 그동안 드라마를 본 내가 한심해지는 느낌이더라도, 그동안 내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즐거워했고 가족들과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진짜다. 지난 몇 주간 내가 느낀 흥미로움과 재미는 진짜다. 이 드라마가 퇴근하고 돌아와 TV 앞에 앉는 나의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는 것은 진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결말이 어떻게 나건 간에 그 결말까지 달려오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들, 내게 미친 영향들은 진실되고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나의 경험, 나의 삶도 아마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나의 인생은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알 수 없다. 운 좋으면 결말도 괜찮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흘려 놓은 '떡밥'들을 적당히 회수하고, 어느 정도 감동도 주고,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하면서 결말을 마무리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말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의 결말은 시시하게 끝날 수도 있다. 별 볼일 없이, 허무하게, 황당하게 인생의 끝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런 엔딩으로 내 삶을 끝맺을 수도 있다. 


그렇게 끝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결말에서 삐끗했다고 해도 그동안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많은 것들, 살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 그런 것들이 모두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살아오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과 내가 했던 행동들은 모두 그 순간에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내가 느낀 그 희로애락들과 경험들은 진짜였다. 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거기에 들인 정성은 모두 진짜이니까.


내 삶의 가치는 결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일로 결정된다.



/

2023년 10월 2일,

침대에 앉아서 거실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Tandem X Visuals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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