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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03. 2023

[D-90] 약속했기 때문에

276번째 글

지금 나는 뉴질랜드에 와 있다. 오랜만의 휴가를 자연의 품에서 즐기기 위해서다. 어제 저녁 한국에서 출발해서 오늘 아침에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고 거기서 국내선으로 환승을 해서 최종 목적지로 향했는데, 그 과정에서 비행기가 여러 번 지연되는 바람에 공항에서 한참을 대기해야만 했다. 결국 집을 떠난 지 거의 24시간이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고, 기다리고, 또 타고, 또 내리는 과정을 24시간 안에 모두 겪으면서 나는 내가 탄 비행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비행기가 나를 뉴질랜드에 데려다줄 거라고 생각하며 탑승했지만, 실제로 그 비행기가 뉴질랜드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 비행기는 사실 캐나다로 가는 거였을 수도 있었다. 승객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이동항로를 가짜로 입력하고 실제로는 인천 상공을 빙빙 돌고만 있었을 수도 있었다. 구름이 잔뜩 깔려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하늘 위에서 승객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이 비행기를 타면 12시간 후에는 뉴질랜드에 도착해 있을 거라고 믿었을 뿐. 정말로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는 채로.


비행기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가령 버스만 하더라도 우리는 사실 그 버스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확신할 수 없다. 지도 앱을 보면서 이리저리 버스를 환승할 때, 우리는 그 버스가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정말로 맞는 방향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단지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게 사회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타면 12시간 후에는 뉴질랜드 땅에 도착해 있을 거라고, 이 버스를 타면 부산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합의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목표를 향해 걸어갈 때도,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나를 그 목표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길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정말로 목표에 다다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 나아갈 뿐이다. 그게 나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과 사회적인 약속을 하듯이, 나를 구성하는 나 자신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걸어 나가고,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그 방향을 선택한다. 단지 약속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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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일,

숙소 침대에 앉아서 뉴질랜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Will Waters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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