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Oct 04. 2023

[D-89] 양이 풀을 뜯듯이

277번째 글

사람마다 여행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다. 내 경우엔 출발 전부터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아주 촘촘하게 스케줄을 짜서 다니는 편이다. 스케줄은 물론이고 언제 어디에 가서 뭘 할지, 뭘 타고 이동할지,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 시간과 경비가 얼마나 드는지,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모두 확인하고 가야 마음이 편하다. 가서 헤매거나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아 좋기도 하고.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많은 것들을 다 신경 쓰면서 다니다 보면 아주 피곤해지기도 한다. 신체적으로도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고,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또 피곤하고, 계획이 생각보다 그다지 좋은 경험을 가져다주지 못했을 때 실망하느라 또 피곤하고, 여러모로 아주 피곤하다. 그래서 나는 세세하게 챙기고 준비하는 스타일이면서도 늘 즉흥적이고 여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성격상 그러기 어려울 거라는 건 알았지만, 적어도 조금 덜 계획적인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뉴질랜드 여행을 와서는 좀 그러고 있다. 이번 여행은 여유를 즐기기 위해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행기와 숙박, 가볼 도시, 교통수단, 안전 정도만 신경 쓰고, 가서 무엇을 할지 세세한 스케줄은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정하기로 했다. 내가 온 이 도시에 무엇이 유명한지 뭘 하면 좋을지는 미리 알아보긴 했지만 '오늘 이걸 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시내 관광, 쇼핑하기, 박물관 가기, 해변에서 놀기 같은 대략적인 계획조차도 세우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가이드와 함께 투어를 시작하지만 오늘은 그냥 빈 시간이다. 푹 쉬고 숙소에서 늘어져라 누워 있고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렇게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는 게 스케줄이다. 계획 없는 하루. 그 하루를 지금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말 할 일이 없다. 어제 피곤했던 만큼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고 미적거리는 중이다. 커피를 한 잔 내려서 햇빛이 잘 드는 창문 옆에 앉아 오후에 뭘 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상태가 너무 좋다. 할 일이 없어서 할 일을 찾아 나서는 그 상태가 좋다. 마치 양이 풀을 뜯듯이. 양은 "오늘은 여기 이 바위 옆에 있는 클로버를 먹고 내일 아침에는 저 언덕을 넘어서 산 중턱 해발 523m 부근의 민들레풀을 뜯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맛있어 보이는 풀을 뜯고, 그 옆의 풀을 뜯고, 그 앞의 풀을 뜯고, 그러다 보면 언덕을 넘어가 있을 것이다. 양의 머릿속은 잘 모르지만 아마 그런 식이지 않을까. 나도 양이 풀을 뜯듯이 오늘 하루를 보내고 싶다. 햇빛이 좋길래 산책을 나가고, 산책길에 꿀차를 팔길래 차를 마시고, 걷다 보니 바다가 나오길래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런 여유롭고 걱정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게 오늘의 목표다.



/

2023년 10월 4일,

침대에 누워서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nine koepfer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90] 약속했기 때문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