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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11. 2023

[D-82] 참고해 볼 수 있을 뿐

284번째 글

타지에서 아픈 것처럼 서러운 게 없다던데, 지금 딱 내가 그 꼴이다. 며칠 전부터 몸살 기운에 앓아누워 있는 상태다. 오랜만에 여행을 와서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좀 무리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를 맞으며 트래킹을 해서 그럴지도. 아니면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처음 묵었던 숙소에서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 바람에 찬물 샤워를 해야 했던 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한국에서부터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는데 그게 잠복기를 거쳐서 지금 증상이 발현된 것일 수도 있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제보다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점이다. 어제는 정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욱신거렸고 침대 시트가 축축해질 만큼 식은땀을 계속 흘렸고 으슬으슬 추운 느낌 때문에 덜덜 떨었었다. 열감도 있었고 목도 아팠고 두통도 심했다. 그래서 어젯밤에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앓으면서 나는 내일을 걱정했었다. 어쩌면 내일은 더 심하게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면 약국에서 다른 약을 사 먹어봐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눈을 뜨자 몸이 마법처럼 가뿐해져 있었다. 여전히 기침과 콧물이 좀 나고 두통도 약간 있지만 어제처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갑자기 몸이 나아 버린 느낌이었다. -100의 상태에서 갑자기 -20 정도의 상태까지 회복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대체 왜 몸 상태가 이렇게 호전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고민을 했다.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셔서일까? 옷을 몇 겹 더 껴입고 잠을 자서 그럴까? 어제 낮에 바람을 쐬러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신 덕분인 걸까? 약을 꾸준히 먹어줘서 그런 걸까? 어제 몸이 너무 욱신거려서 샤워를 하지 않고 건너뛴 것이 도움이 되었던 걸까? 아님 반대로 그 전날에 했던 뜨거운 물 샤워가 회복을 도와준 것일까? 밥을 잘 먹고 다니려고 노력했어서 그랬나? 방 안 환기를 잘 시켜줘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시기상으로 바이러스의 기세가 누그러들 때가 되었던 것뿐일까? 나는 이렇게 내 상태를 호전시킨 원인을 찾아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를 명확한 이유로 집어낼 수가 없었다. 


만약 이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 재현도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번에 이렇게 감기몸살에 걸려 앓아누워 있을 때 똑같이 행동하면 몸을 아주 효율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많은 이유들 중 무엇이 나를 낫게 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 전부가 모두 조금씩 영향을 미쳐서 낫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게 과학 실험이었다면 비교군을 마련해서 실험 환경을 철저히 통제해 가며 원인을 분석했겠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유를 알아낸다고 해도 언제나 그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이번에만 적용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번에는 아프게 된 원인과 나의 상태와 내 주변 환경과 상황이 모두 변해서, 이번에 효과적이었던 것이 다음에는 전혀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악화시킬 수도 있고.


원인을 모른다는 것과 안다고 해도 재현해 내기 어렵다는 점. 그게 이 인생의 참 고단한 점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참고하는 것뿐인 것 같다. 재현이 아니라 참고만 가능할 뿐. 이번에는 내 몸을 회복시킨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다음번에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 뭔가를 더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조금씩 더 쌓이고 나면 훨씬 더 많은 참고사항들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쌓인 경험들을 참고해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조금씩 내 선택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처음 장을 볼 때, 셀프계산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잘 몰랐었다. 뉴질랜드의 셀프계산대는 조금 복잡하다. 한쪽에 내가 살 물건들을 모두 올려놓은 뒤, 하나씩 바코드를 찍어서 등록을 하고, 반대쪽에 내려놓아야만 한다. 만약 바로 장바구니에 넣거나 다른 쪽에 내려놓으면 계산이 되지 않는다. 직원이 와서 카드를 찍어 주어야만 계산을 계속할 수 있다. 아마 무게를 측정하거나 다른 무슨 시스템이 있는 듯한데, 처음에는 그 시스템을 몰라서 쩔쩔맸었다. 몇 개 안 되는 물건을 계산하는데도 직원에게 여러 번 도움을 청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잘 안다. 나는 뉴질랜드 마트의 셀프계산대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알게 되었다. 이전의 경험들로부터 인사이트를 얻고, 그걸 참고해서 배우고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생은 마트 셀프계산대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계속해서 시도하고, 겪어보고, 경험해 봄으로써 인사이트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인사이트를 참고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나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살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어도, '한번 이렇게 시도해 보자'라고 결심할 수는 있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단계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다.



/
2023년 10월 11일,
침대에 기대앉아 바람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Datingscout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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