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Oct 12. 2023

[D-81] 너와 함께하기 때문에

285번째 글

어제 점심은 뉴질랜드에서 해본 식사 중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다. 가장 즐거웠고 가장 많이 웃었다. 음식이 맛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경험이 재밌어서다. 어제 점심은 마트에서 산 재료들로 숙소에서 친구와 함께 요리를 해서 먹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결과물은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는 단계부터가 문제였다. 뉴질랜드의 명물이라는 홍합을 이용해서 해산물 파스타를 해 먹기로 하고 마트에 간 것까지는 좋았다. 미리 손질해서 파는 홍합과 채소를 발견해서 장바구니에 담은 것까지도 좋았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좀 문제였다. 파스타 면은 일반 파스타를 찾지 못해서 생면으로 사야 했다. 파스타 소스는 작은 용량이 없었다. 버터와 치즈도 역시 작은 게 없었다. 소금이나 후추 같은 기본 향신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두 용량이 큰 것으로 샀다.


그래도 장을 보는 것까지는 수월한 편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인덕션 스토브를 켜 보았는데 작동을 하지 않았다. 설명서를 보고 열심히 따라 해 보았지만 결국 켜는 데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할 수 없이 친구와 나는 파스타 면은 전자레인지에 물과 함께 넣어서 돌리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했고, 홍합과 채소는 오븐을 사용해서 굽기로 했다. 하지만 전자레인지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그나마 오븐이 작동해서 다행이었다. 결국 우리는 전기포트로 물을 끓여서 파스타 냄비에 부어 살짝 익힌 뒤, 구운 홍합 위에 면과 소스, 채소, 치즈를 얹어 오븐에 넣고 돌리는 방식으로 요리를 해야만 했다.


요리 방식이 영 미심쩍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재료를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홍합도 사 온 것 전부를 넣어 구웠고, 오븐 그릇에 많은 양의 버터를 칠했고, 치즈도 잔뜩 얹었고, 토마토 소스도 한 병을 다 넣어버렸다. 그래서였는지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다. 처음 의도했던 파스타의 형태는 아니고 본의 아니게 오븐구이 파스타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맛은 끝내줬다. 난장판이 된 부엌을 방치하고 테이블에 앉아 파스타를 먹는 것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마트에서 산 샴페인을 곁들여 마시며 잔을 부딪히는 것도 좋았다. 내내 사고의 연속이었는데도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식사가 성공적이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나와 친구 둘 다 요리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기본적인 요리 센스가 있어서 한 가지 방법이 실패할 경우 다른 방법을 금방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요리의 완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식재료를 대용량으로 사야 했던 것도 오히려 다행이었다. 오래 삶지 않아도 되는 생면 파스타를 산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다른 도구는 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어도 전기포트와 오븐만은 정상적으로 돌아간 것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엉망진창이었던 점심 식사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이 난관을 함께 헤쳐 나갔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 혼자만이었다면 쉴 새 없이 투덜거리고 짜증을 내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요리를 해 보려고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와 함께였기 때문에 우리는 스토브가 작동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며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었고, 머리를 맞대 가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고, 뭔가 사고가 일어나고 깔깔거리고 웃으며 이것도 다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함께 헤쳐나갈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어제의 점심식사를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 나란히 앉아 먹었기 때문에 맛있었고, 덜 힘들었고, 즐거웠다. 함께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가 보다. 'Better with you', 너와 함께라면 더 나아진다는 것.


점심을 먹으며 나와 친구는 <반지의 제왕> 영화를 보았다. 새삼스럽게 프로도와 샘의 동료애와 우정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도는 샘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끝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샘 역시 프로도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 여정의 끝까지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프로도와 샘의 여정 같은 게 아닐까. 'Better with you',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힘을 모으면 해낼 수도 있다는 것, 견디기 어려운 일들도 함께라면 견뎌 볼 수도 있을 거라는 것 말이다. 



/
2023년 10월 12일,
창가 테이블에 앉아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Erik Mclean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82] 참고해 볼 수 있을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