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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13. 2023

[D-80]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될 거야

286번째 글

어젯밤, 친구와 함께 숙소 소파에 앉아 감자칩 한 봉지를 비우며 영화를 보았다. 원래 어제는 펍에 가서 피자에 맥주를 마시며 즐길 생각이었는데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맥주는 포기하고 그냥 집에서 쉬기로 했다. 그래서 펍 대신 마트에 가서 감자칩과 탄산음료를 사 와 영화를 틀었다. 원래 계획과는 달라진 저녁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서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제 저녁은 즐거운 하루였다. 몸살 때문에 두통이 조금 심했지만 그래도 어제 하루도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햇빛이 좋았고 바람이 시원했고 마트 직원은 친절했고 밤에 본 영화는 재밌었고 감자칩은 맛있었고 소파는 편안했다.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영화를 끄고 들어가 잘 준비를 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 "잘 자. 오늘도 좋은 하루였어.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될 거야."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감기몸살의 여파로 몸이 욱신거리고 두통이 있었지만 나쁜 하루는 아니었다. 몸 상태로 인해서 계획이 틀어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는 없지만 내일도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앞으로 내게 남은 모든 하루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무리하고 싶다고.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 나 자신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면서, "잘 자. 오늘도 좋은 하루였어.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에 들고 싶다고. 오늘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고 해도, 내일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냥 괜찮았다고 믿고 그렇게 잠들고 싶다고 말이다. 내일이 오지 않더라도, 그대로 몇 초 후에 내 심장이 멎더라도 나는 그렇게 희망을 갖고 자리에 눕고 싶다.


그저께 새벽에 친구는 무엇인지 모를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깊이 잠들어서 듣지 못했지만.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깬 친구는 그 소리가 화재경보 알람일까 봐 무서워서 덜컥 겁을 먹었다고 한다. 이대로 죽는 걸까, 말도 잘 안 통하는 타지에서 생을 마무리하는 걸까, 지금 당장 건너편에서 자는 나를 깨워서 내려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런데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친구는 사이렌 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별일 아닐 거라고 믿으면서.


다음 날 아침에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면서, 친구는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고 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서 어느 노부부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날인 것처럼 침대에 누워 서로를 껴안고 최후를 맞는 장면. 친구는 자신이 간밤에 침대에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평범한 날이라고, 내일도 평범하게 찾아오리라고 믿었던 것처럼, 아마 그 노부부도 똑같은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어젯밤 침대에 누워서 친구가 들려준 이 이야기를 생각했다. 내일도 별 탈 없이 평범한 하루가 펼쳐질 거라는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생각했다.


"잘 자. 오늘도 좋은 하루였어.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될 거야." 오늘 밤도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잠들 것이다. 모레도, 글피도, 그 다음 날도, 죽기 전날 밤에도, 늘 이렇게 말하며 잠에 빠져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성공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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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3일,
창가 테이블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커버: Image by Marek Studzinski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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