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Oct 16. 2023

[D-77] 집이란 익숙함이구나

289번째 글

어젯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 나는 2주 만에 집 현관문을 밟았다. 익숙한 동네의 익숙한 거리를 지나 익숙한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고 익숙한 길을 따라 익숙한 문으로 들어서서 익숙한 사람들과 재회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나 집 안이나 가족이나, 모두 2주 동안이나 멀리 떠나 있었는데도 조금밖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2주라는 시간은 뭔가가 드라마틱하게 변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돌아왔는데도 마치 조금 전까지도 이곳에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어제 집 현관문에 들어서면서 나는 이곳에 새삼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집은 나의 생활이 겹겹이 묻어 있는 공간, 이 집에 함께 사는 가족들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나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 이곳에는 낯선 것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이 익숙함이 바로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란, 나를 변함없이 맞아주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들어서도 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고, 분명 변한 것들이 있을 텐데도 늘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고, 새롭게 적응하지 않고 그저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인 거였다.


'역시 집이 좋구나.' '집 떠나면 고생이다.' 같은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나는 이 여행을 최대한으로 즐겼고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행이 너무나도 짧아서 아쉽다고 느껴진다. 나는 더 모험하고 싶고, 더 낯선 곳에 가서 낯선 경험을 해 보고 싶다. 하지만 그런 새로운 것들이 내게 소중한 것처럼 집이 주는 이 익숙함과 안정감도 소중한 것은 사실이다. 두 가지를 저울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두 가지 다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들이다.


이 익숙함에 대해서 곱씹으며, 나는 '집'의 개념을 물리적 공간에서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사람으로. 어떤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마치 어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함께하지 못하고 비어있는 시간 때문에 서로에 대해 새로 알아가야 것들이 많은데도 낯설다는 생각이나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변했다고 느껴져도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 친구는 여전히 그 친구이다. 나와 특정한 시간을 함께했던 나의 익숙한 친구. 이런 친구는 나에겐 '집'이다.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대상이자 돌아갈 수 있는 피신처이다.


문득, 영화 <퍼스트 카우>의 오프닝에 나왔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떠올랐다. 우정이라는 집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한 구절이.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새에게는 둥지가, 거미에게는 거미줄이, 인간에게는 우정이.


익숙한 나의 집에 앉아서 내게 집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
2023년 10월 16일,
내 방 책상에 앉아 익숙한 것들을 둘러.



*커버: Image by Scott Webb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78]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낯선 사람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