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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17. 2023

[D-76] 어디까지가 유전일까

290번째 글

지금 내 다리는 아주 심하게 부어 있다. 과장을 좀 보태면 거의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있는 느낌이다. 붓기가 너무 심하다 보니 걸음걸이도 뻣뻣하고,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욱신거리고, 무릎은 잘 구부러지지가 않는다. 양 발이 특히 많이 부었는데, 신발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운동화 끈을 느슨하게 풀어야 했을 정도이다. 이 심각한 붓기의 원인으로 나는 이틀 전 일요일, 12시간 동안 장거리 비행을 했던 일을 지목하고 있다. 원래 비행기를 장시간 타면 다리가 붓는다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그런데 이 붓기는 어쩌면 유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엄마가 내 발을 보고 했던 말 때문이다. 어떻게든 부기를 빼 보려고 발을 이리저리 마사지하고 있었는데, 형편없이 부어오른 내 발을 보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원래 외가 쪽 사람들이 다리가 잘 붓는 편인데, 어쩌면 나도 그 유전자를 이어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왠지 맥이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전까지 나는 발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부은 원인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와인을 마셔서 그런가? 족저근막염 때문일까? 비행기를 타기 전에 너무 많이 걸어서 그 영향인가? 양말이나 운동화에 문제가 있었나? 걷는 자세가 안 좋았던 걸까? 혈액순환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계속 하면서 내 평소 생활습관이며 건강 문제들을 쭉 나열해 보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다리가 잘 붓는 체질을 유전적으로 타고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가설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부은 발을 주무르며 나는 내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것들 중, 어디까지가 유전이고 어디서부터가 내가 만든 것인지를 생각했다. 지금의 나를 정의하는 수많은 조각들은 어쩌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일 수도 있다. 그저 유전자의 영향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랬을 수도 있다. 운 나쁘게 또는 운 좋게 그런 유전자를 타고나서 내가 이런 사람으로 자라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유전의 영향은 적은 편이고 대체로 나를 둘러싼 환경이나 나 스스로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나갔을지도 모른다.


만약 나를 나답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모든 좋은 점들과 나쁜 점들과 그 사이의 것들이, 전부 유전이라면 어떨까? 그건 내가 선택한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 된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운명 지어진 사람이라는 뜻, 그래서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적다는 뜻이 된다. 그저 내 복이려니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반면에 내가 유전자의 영향보다는 환경과 나 자신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거라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그저 나 자신이라면? 그러면 나는 나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내가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해결할 수도 있고 내가 고칠 수도 있는 거다.


이 두 갈래의 생각 중에서 어떤 쪽으로 마음을 더 기울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만약 유전의 탓을 하게 된다면 자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게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즉 지금의 내가 이 모습인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내가 왜 이럴까를 고민하며 괴로워하기보다는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만 고민하면 된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유전자 때문에 내가 이런 사람이 된 거라면, 그러면 나의 모습을 조금 더 받아들이기가 쉬울 것 같다. 그렇게 나를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울적한 성향을 타고났다면 평소에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내가 약한 체력을 타고났다면 체력을 조금 더 기르기 위해서 노력하면 된다.


또 만약 환경과 나 자신의 탓을 하게 된다면, 나는 가능성의 상태에 놓인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바꿔 놓을 수도, 다르게 만들 수도, 되돌려 놓을 수도 있다. 내가 할 일은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일이다. 그리고 내 강점을 찾고 그것을 더 강화해 나가는 일도 있다. 어차피 다 내가 한 거니까 해결책도 분명 내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스스로 원하는 그 이상향의 상태로 나아가면 된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지금의 나는 미래에는 내가 바라는 내 모습대로 나 자신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 두 가지 중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내게 더 도움이 될까? 그걸 고민하다가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정답을 알기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데에 유전과 환경이 각각 몇 퍼센트를 차지했는지 확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추리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두 가지 가치관을 모두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둘 다 어느 정도는 정답이고, 둘 중 어느 하나에 더 무게를 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면 빨리 손을 써 보고 열심히 해 보는 거다. 그래서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는 거다. 또 내 유전자에 새겨진 거라서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거라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면 된다. 오케이, 어쩔 수 없어, 그럼 이제 이게 나를 더 이상 좀먹지 않도록 하자. 그 과정을 거치면서 더 나빠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 된다. 굳이 해결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
2023년 10월 17일,
버스에 앉아 부은 발끝을 꼼지락거리.



*커버: Image by Camila Levit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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