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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15. 2023

[D-78]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낯선 사람들에게

288번째 글

약 2주간의 뉴질랜드 여행이 오늘로 끝이 난다. 한국과 4시간의 시차가 나는 지금 이곳은 아침 9시 20분 전.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12시간의 비행을 거쳐서 서울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4시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떠나왔을 때도 처음 며칠간은 실감이 나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그저 그러려니 하면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한 가지 있긴 하다. 바로 내가 오늘 오클랜드를 떠나면 이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시는 마주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다. 내가 자주 가던 편의점의 사장님, 늘 쾌활하게 맞이해 주었던 펍의 바텐더, 길을 가르쳐 주었던 아저씨,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몇 시간 뒤면 마법처럼 나의 일상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곳의 다른 사람들이 채우게 될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이 오늘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고, 슬프게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내가 출퇴근길에 대중교통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길을 걸을 때 내 양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영화관에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 쇼핑몰이나 터미널처럼 붐비는 장소에서 우연히 어깨를 맞댄 사람들 모두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다시는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낯선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만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푼다. 며칠 전, 나와 친구는 식사 때를 놓쳐서 늦은 시간에 밥을 먹으려고 길을 헤맸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식당은 7~8시면 문을 닫고, 그 이후에 문을 여는 것은 메뉴에 음식이 없고 술만 파는 펍이나 바 뿐이다. 점심시간에는 간단한 요리를 팔았더라도 저녁이 되면 술만 제공하는 곳들이 많다. 무작정 펍에 들어가서 혹시 음식도 파냐고 물어보는 우리에게 웨이터는 음식 메뉴가 없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어디에 가면 늦은 시간에도 식사를 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알려주었었다. 우리는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24시간 영업하는 가게를 찾아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 웨이터는 우리를 무시하거나 음식 메뉴는 없다고만 말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시간을 몇 분이나 투자하며 길을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친절을 베푼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 점이 신기하면서도 대단하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의식적으로 친절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생물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의 누군가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리라는 사실이.


이 오클랜드라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경험은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앞으로 평생 이곳에 다시 와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곳의 사람들 대부분은 다시는 마주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집에 돌아가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에는 불빛들이 빼곡하다. 나는 그 아파트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몇십 걸음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앞으로 영원히 알지 못할 수도 있고, 한 번도 스쳐 지나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세상은 전부 낯선 사람들 투성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이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고 싶다. 기억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기 때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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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5일,
마지막으로 창가에 앉아 오클랜드 풍경을 내려다보.



*커버: Image by Dan Freema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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