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Oct 27. 2023

[D-66] 쓰이지 못한 이야기들

300번째 글

나는 글로 써보고 싶은 생각들이 떠오르면 메모장에 적어 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러프한 아이디어들, 지금은 바빠서 쓸 수 없는 이야기들, 나중에 각 잡고 쓰고 싶은 소재들, 그런 것들이 메모장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떤 메모들은 몇 시간 후에 바로 글로 적힌다. 어떤 메모들은 하루를 묵혔다가 다음 날 메모로 적힌다. 또 어떤 메모들은 몇 번에 걸쳐서 계속 생각이 추가되고 변경되고 수정되었다가 어느 날 글로 적힌다. 어떤 메모들은 그런 메모를 해놨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글로 적힌다.


그리고 어떤 메모들은 아예 잊힌다. 내가 메모한 이유를 까먹어서, 또 그 메모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나중에 보면 기억해 내질 못해서. 이 메모가 무슨 상황에서 나온 말인지를 기억해 보려고 애를 써도 끝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런 메모들은 대부분 간단하게 한두 문장 적어 둔 게 전부라서 나중에 내용을 유추해 내기도 어렵다. 분명 그걸 적어두었을 당시에는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발전시켜 볼 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서 거기 적어둔 것일 텐데, 가끔씩은 도저히 기억해 내지를 못한다.


나는 이런 메모들의 경우 아마 그렇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너무 아쉽긴 하지만, 그걸 적었던 당시의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내용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내가 기억해 내질 못하는 걸 보면 아마 지금의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그래서 지금 기억해 내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이건 걸작이 될 수 있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해서 그런 걸작을 써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으니까.


내 메모장만 해도 이렇게 글로 적히지 못한 글들이 많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잊히고 말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서글퍼진다. 누군가의 메모장 속에 숨어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또는 적혔지만 사라져 버린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말이다.


 오늘은 올해의 300일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내가 나와의 화해를 목적으로 매일 한 편의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지 300일째 되는 날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300번째의 글이다. 그 300편의 글을 쓰는 동안 얼마나 많은 글들이 메모장에 적히고 또 잊혔을 것인가. 또 나는 앞으로 과연 얼마나 더 많은 글들을 메모장에 적어두고 잊어버릴 것인가.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
2023년 10월 27일,
버스에 앉아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Tim van Cleef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67] 빠르고 느린 시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