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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Nov 03. 2023

[D-59] 숨 쉴 수 있는 공간

307번째 글

숨 막히게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 말장난처럼 들리는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나는 얼마 전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피부로 직접 경험했다. 점심시간에 커피를 들고 나가서 근처 공원에서 잠깐 산책을 했는데, 그 공원에 들어가는 순간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높은 아파트들과 빌딩 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평소 업무 시간 내 주변은 온통 회색이다. 유일하게 잿빛을 띠지 않은 것이 바로 그 공원이다. 공원에는 잔디와 나무, 갈대밭, 물가가 있고 늘 조용하고 평화롭다. 그 공원은 빌딩들 사이의 답답함을 해소해 준다. 그 공원은 내게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준다.


숨 쉴 공간이라는 것은 마음의 여유나 휴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말 그대로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근처에 산책을 할 수 있는 공원이 있어서, 나는 이 잿빛 도시 속에서 숨 쉴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모두에게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쉼'의 공간 같은 것. 누군가에게 이런 숨 쉴 공간은 퇴근하고 들어서는 내 집, 내 방일 수도 있고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카페일 수도 있고 분위기 좋은 작은 서점일 수도 있고 집 앞 벤치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책상 위에 이불을 걸어서 커튼처럼 만들어 놓고 책상 밑 공간에 들어가서 놀았다. 그곳이 내 비밀 아지트라고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그 책상 밑의 비밀 아지트가 숨 쉴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옷장에 들어가서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 옷장 역시 내 숨 쉴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또 나는 집에 갈 때마다 늘 큰길이 아니라 아파트 뒤쪽의 오솔길을 택하는데 그 길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숨 쉴 공간이었던 것 같다. 나를 조금 덜 숨 막히게 해 주는 곳, 내게 약간이나마 더 안전하고 여유롭다는 느낌을 주는 곳.


이런 숨 쉴 공간은 시간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숨 쉴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내게 숨 쉴 시간은 팀원들과 수다를 떨 수 있는 회사의 점심시간이나 티타임 시간이다. 또 재택근무를 할 때 넷플릭스를 틀어 두고 앉아서 점심을 먹을 때도 내 숨 쉴 시간이다. 퇴근 이후 소파 앞에 앉아서 폼롤러로 다리를 마사지할 때도 그렇고, 오늘은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눈을 뜨는 주말 아침도 그렇다. 또 이 글을 쓸 때도 내게는 숨 쉴 시간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주변의 상황과 나를 둘러싼 수많은 일들을 잊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낀다.


내게 숨 쉴 공간과 숨 쉴 시간이 남아 있는 이상, 아직 숨을 쉬고 살아볼 만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숨 쉴 수 있는 기회들을 계속 찾고 있는 한 이런 공간과 시간들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계속 숨 막히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내 곁에 약간씩은 남아 있을 것이다.



/
2023년 11월 3일,
버스에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Meg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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